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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반도체 산업 지원과 국가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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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며칠 전 후배 교수 부친 빈소에서의 일이다. 조문 후 식사 자리에서 다른 교수 셋과 겸상을 했다. 셋 모두 경제학과 교수인데, 둘은 원래 안면이 있었고 한 명은 처음 인사했다. 문상객으로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교수란 직업 특성 탓에 세상 얘기를 해도 대충 전공과 관련된 얘기를 하게 된다. 넷 중 가장 연장자인 나부터 시작했다. 최근 몰두하고 있는 퇴직연금 얘기를 꺼냈다. 형편없는 수익률 문제를 거론하면서 정부의 직무유기를 성토했다. 별반 호응이 없었다.

나 혼자 흥분한 게 머쓱해질 무렵 두 번째 연장자인 교수가, 연금도 중요하지만 반도체 문제는 정말 시급하다면서 주제를 전환했다. 그러자 다른 두 교수가 반색하면서 토론에 뛰어들었다. 나 역시 다른 교수들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끼어들었다. 그날 나눈 얘기를 정리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A교수: 이건 국가 간 경제 전쟁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대만 할 것 없이 모두 반도체 산업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정부가 나서서 적극 지원하고 있어요. 미국만 해도 자국 기업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기업도 미국 내에 공장만 지으면 막대한 보조금을 줍니다. 우리만 뒷짐 지고 있어요. 이러다간 죄다 해외로 옮길 수 있어요.

나: 아니, 그러니까 지금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정부가 조세 지원도 모자라니 보조금을 줘야 한다는 건가요?

B교수: 그래요, 반도체는 우리 경제의 핵심입니다. 이게 경쟁력을 잃거나 해외로 이전하면 우리는 망하는 겁니다.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느냐 마느냐 문제는, 과거의 경부고속도로를 놓느냐 마느냐, 포항제철(포스코)을 짓느냐 마느냐와 마찬가지예요. 지금 기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어요.

나: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은 정부 소유지 민간 것이 아니잖아요. 정부가 왜 잘나가는 민간 대기업을 지원해야 하지요? 설령 지원이 필요하다 해도, 반대급부로 정부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A교수: 안 그러면 우리 경제가 큰일 나니까 그렇지요. 왜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은 지원하면서 대기업을 지원하면 안 되나요? 괜히 애먼 데 지원해서 돈 날리느니, 반도체 대기업 지원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반도체 기업이 잘되면 법인세를 많이 내니 정부도 이득이지요.

나: 아니, 법인세는 기업이 돈을 벌면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인데, 이게 무슨 정부가 지원의 대가로 얻는 이득인가요? 게다가 지원 수단으로 법인세도 감면을 해주잖아요.

C교수: (시니컬한 표정으로) 김 교수님,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정부는 돈 없어서 지원 못해요. 하려면 수십 조는 들어갈 텐데, 정부가 어떻게 하겠어요.

대기업 ‘이익의 사유화’는 곤란

집에 돌아와 장례식장에서의 대화를 복기하니 혼란스러웠다. 명색이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인데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심지어 직접적인 보조금 지원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니, 행정학자로서 정부 역할을 중시하는 나조차도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던 걸 반성하면서 관련 주제를 검색했다. 과연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 지원을 촉구하는 기사와 사설이 쏟아졌다. ‘지금 국가적 의제는 연금이 아니라 반도체여야 한다’ ‘반도체 자유무역 시대는 끝났다’ ‘미·중 반도체 싸움, 불씨 어디로 튀든 철저 대비를’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국가 간 총력전’ ‘반도체특별법, K칩스법, 내일 당장 통과시킨들 만시지탄’ 등등.

정부와 정치권이 손 놓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부는 지난 5월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정책금융(17조원), 반도체 생태계 펀드 조성(1조1000억원), 반도체 클러스터의 도로·용수·전력 인프라 구축(2조5000억원) 등이 제시되었다. 여야 정당도 지난 7월 반도체 지원 법안을 앞다투어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조금 빨랐다. 민주당 법안은 정부안보다 훨씬 강력했다. 정책금융을 100조원 규모로 확대했으며, 세액공제율도 기존보다 10%포인트씩 높이고 기간도 10년 연장했다. 국민의힘 법안도 민주당 법안과 유사한 지원책을 담았다. 그리고 반도체 산업 지원의 컨트롤타워로서 민주당은 국가반도체위원회, 국민의힘은 반도체산업본부 설립을 주장했다. 또한 여야 모두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힘들어도 이를 우회해 사실상 보조금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다(미국은 대놓고 보조금을 주지만, 그건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보수 여당과 대기업 특혜라면 펄쩍 뛸 진보 야당 모두 정부의 반도체 기업 지원 확대를 촉구한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의 막강한 로비 영향도 있겠지만, 여하튼 여야가 한마음 한뜻이 된 것은 그만큼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신토불이’가 대한민국 경제에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이해했으나 여전히 혼란스럽다. 과거 개발연대의 유물로만 여겼던 대기업 정책금융과 조세감면, 게다가 보조금 지원까지 부활한다니. 그냥 유행이 돌고 돌듯 정부·기업 관계도 그러려니 여기자고 마음을 다지지만, 한 가지는 영 불편하다. 과거 대기업 특혜의 병폐인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가 재발하는 것이다.

정부 지원 ‘과실’ 평등한 배분 필요

끊임없는 혁신 아니면 도태되는 오늘날의 경제 전쟁에서 정부와 기업이 상생의 파트너십을 맺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상생’을 내세우면서, 예전에 사람들의 비난을 샀던 구태(舊態)가 의연(依然)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반도체 산업 지원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여야의 굳은 결의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한 박자, 아니 반 박자만 늦춰서 정부 지원의 과실이 대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이 내용까지를 법안에 담도록 하자. 이를 위해 행정부와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와 언론계, 시민사회의 중지를 모으자. 후발선지(後發先至). 길을 잘 닦아놓으면 늦게 출발해도 먼저 닿는다.

경향신문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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