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인상적인 건 한국보다 몇 발 앞선 일본 야구의 코칭 시스템이었다. “한국은 타자들이 타격감이 좋지 않으면 ‘일단 밀어쳐’라고 하죠. 선수들이 자신의 타격 방식보다 타격 코치의 스타일에 맞춰야 했습니다.” 일본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코치들이 선수마다 타격 자세와 컨디션을 분석해서 그에 맞는 해법을 제시했어요. 이미 미국 야구를 많이 흡수한 것도 놀랐습니다.”
현역 은퇴 후 이범호는 해설가나 방송 활동을 택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힘든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일본에서 배운 것을 나 혼자만 알고 썩히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은퇴한 동료들이 ‘힘든 일 말고 우리랑 야구 예능에 나가자’고 했지만, 그는 애써 배운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길을 택했다.
2017년 우승 이후 중하위권으로 떨어진 KIA를 코치로 지켜본 이범호는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끔한 질책이나 세세한 지도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실수해도 다음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시즌 중 체력 저하를 막아줄 ‘시의적절한 휴식’이 더 절실했다. 올 시즌 갑작스레 감독이 됐지만 “실수해도 선수들을 믿자”는 자기 철학을 밀어붙였다.
이범호 감독은 다른 지도자들이 ‘실책과 볼넷을 줄여야 한다’고 한 것을 선수 입장에서 되짚었다. 호수비를 하려다 실책한 것을 꾸짖으면 야수는 더 좋은 수비를 시도하지 않는다. ‘볼넷 주지 마’라고 질책하면 투수들은 스트라이크존 구석으로 과감하게 던지지 못한다. 올 시즌 최연소 30홈런-30도루를 달성한 김도영은 올 시즌 수비 실책을 30개나 했지만, 이범호는 그를 계속 주전으로 기용했다. 김도영은 38홈런-40도루라는 역대급 활약으로 부응했다.
이범호처럼 믿어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당장 옆에 있는 부하 직원의 어이없는 실수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솟고 질책이 앞선다. 물론 이범호 감독도 ‘느슨한 플레이’는 결코 용납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올 시즌 내내 “선수들의 실책과 패배를 홀로 삭혔다”고 했다. 혹시나 속마음이 새어 나갈까 코치들에게도 아쉬운 말을 하지 않았다.
인내로 믿음을 지킨 이범호의 리더십은 부임 8개월 만에 KIA의 정규 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냈다. 작은 실수와 실책을 용납하지 않고 규율과 질서를 유독 앞세우는 한국 사회 전반의 리더십 문화에 이범호의 ‘믿어주기’가 물음표를 던진 셈이다.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 늘어나려면 어른들의 세세한 조언과 지도보다 좀 더 믿고 지켜봐 주는 인내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배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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