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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2차대전 격전지·핵잠 침몰로 푸틴에겐 악몽인 쿠르스크...북한군은 총알받이 될까 [필동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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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지로 주목받는 곳이 지난 8월 우크라이나가 일부 점령한 서부 도시 쿠르스크다. 그 단어가 러시아인들에게 주는 느낌은 극과 극이다. 1943년 7~8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 일환으로 일어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 승리로 히틀러 멸망의 기틀을 마련했다.

반면 2000년 8월 12일 발생한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사고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과 함께 러시아(소련) 당국의 무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노르웨이 인근 바렌츠해에서 군사 훈련 도중 잠수함 내부 폭발과 화재로 인해 118명이 숨졌다. 러시아는 서방의 인양 구조 제의를 뿌리치고 시간만 끌다가 승조원 전원이 사망하면서 유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2000년 집권 첫해,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하야 위기까지 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쿠르스크호 사고 기일 일주일 전, 쿠르스크 공격을 감행한 것은 푸틴의 염장을 지르려는 기도였다. 젤렌스키는 지난 8월 12일 연설에서 “바로 24년 전 쿠르스크호 침몰이라는 재앙이 있었다. 우리의 쿠르스크 진격은 푸틴이 벌인 전쟁을 재앙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작전명도 ‘쿠르스크호 격침’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2019년 프랑스에서는 ‘쿠르스크(Kursk)’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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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쿠르스크주와 접경지역인 우크라이나 수미주에서 이동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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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전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앞서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전투 참패를 만회하려 막대한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해 회심의 공격을 가한 사건이다. 젤렌스키가 전세 역전을 노리고 반격한 지역이 쿠르스크라는 점에서 공통 분모가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사·실종자·포로 규모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각각 20만명, 25만명에 달했다. 독일은 전차 720대, 전투기 681대를 잃었고, 소련은 이보다 훨씬 많은 6064대, 1626대나 됐다.

당시 소련은 독일 전차의 기동성을 염려해 참호를 파놓고 맞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전투 초반 독일은 승승장구하며 소련과 새 전쟁을 치를 기반을 마련하는 듯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전국 각지에서 군수 물자를 계속 보급받아 물량 부족에 처한 독일을 압도했다.

또 연합군 일원인 소련 스탈린의 요청으로 영·미 군대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상륙해 전선을 확대하자 히틀러는 쿠르스크 병력을 빼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련에 어설픈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이 젤렌스키의 쿠르스크 일시 점령이 과거 독일의 사례를 따라갈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크라이나군은 지원 부족에 허덕이고, 러시아의 공세가 강화되면 쿠르스크 주둔군은 우크라이나 본토를 지키려 퇴각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푸틴이 한동안 쿠르스크 탈환을 크게 서두르지 않은 것도 ‘시간은 내 편’ 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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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28일 서울 주한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북한군 러시아 파병 중단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 2024.10.28[이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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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에 간 북한군 일부가 지난 25일 우크라이나군과 첫 교전했다는 소문이 나오고 있다. 북한군이 쿠르스크 탈환에 역할을 해낼지, 아니면 무력한 총알받이가 돼서 24년 전 승조원들의 비극을 반복할지 아직은 모른다. 북한군까지 동원한 푸틴도 얼마 전 땅까지 빼앗긴 ‘쿠르스크’의 악몽이 더는 재현되지 않길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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