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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피라이터’였다. 직업에 ‘라이터’라는 단어가 들어가있듯, 내가 일을 배우던 시절의 팀장님도 책을 몇 권씩이나 냈던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동료 선후배 중에도 책을 낸 사람이 꽤 많이 있다. 그런데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카피라이터들 중에 난 동료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책에는 영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포비아’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었고, 가끔 재미있는 소설을 동료들에게 추천 받으면 시작은 해보지만 끝내지는 못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
표현의 한계 없는 ‘글 콘텐츠’
이번에 독서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책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연원은 ‘아버지’에게서였던 듯 싶다. 나의 아버지는 독서광이었다. 내 방은 아버지의 서재이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본인이 읽었던 문학작품 중에 내가 읽어볼 만한 책들을 골라 주셨다. 이문열의 ‘삼국지’, 홍명희의 ‘임꺽정’ 같은 지금 보아도 재미있는 책들. 여기까지의 흐름으로 보자면 “그렇게 부자는 함께 책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로 이야기가 아름답게 끝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나의 사춘기는 심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시작되어 중학생 시절 내내를 지배했던 나의 사춘기는 부모님의 모든 것에 반항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기 싫어했다. 나는 책보다는 만화책을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만화책을 보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했고, 거실에서 티브이(TV)를 보고 있으면 책 읽는데 방해된다며 티브이를 끄라고 하셨다. 그 놈의 책.
대학 시절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다녔는데, 고향에 가서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실 때면, 정치 얘기로 싸우고, 어떤 신문을 보냐로 싸우고, 마지막엔 꼭 책 얘기로 싸웠었다. 나의 주장은 이랬다. “글로 써진 콘텐츠든, 영상화된 콘텐츠든, 만화든 표현 방식이 다를뿐이지 그 콘텐츠의 우열은 없다.” 아버지의 주장은 이랬다. “그렇게 고심 고심해서 쓴 글과 맨 연예나 하고 웃고 떠드는 티브이 드라마가 어떻게 같냐?” 그때의 아버지는 젊었고, 그때의 나는 어렸다. 아버지와 나의 갈등 관계는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힘이 좀 빠지실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또 나도 좀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도 다 큰 아들놈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가 겸연쩍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사회 생활을 시작했는데, 뜬금없게도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버렸다. 아무리 스스로 아니라고 해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홍명희의 ‘임꺽정’, 이문열의 ‘삼국지’, 박경리의 ‘토지’, 이청준의 ‘눈길’ 같은 책들이 나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듯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문학 작품을 잘 읽지 않는 카피라이터이자, 회사원이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넷플릭스에서 ‘삼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몇 년만에 소설을 읽게 되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인데, 그 뒷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수가 없어서. 드라마 ‘삼체’는 시즌2를 의식하여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뒷이야기를 풀어주지 않고 시즌1을 끝내버렸는데, 궁금함이 극에 달한 나는 원작 소설을 통해 그 뒷이야기를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소설 ‘삼체’는 총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야기가 좀 복잡한데, 드라마를 기준으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신의 별에 위험이 닥쳐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그리고 침공을 환영하는 지구인, 침공을 막아내려는 지구인. 이 세 집단간의 갈등 관계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재미있다 없다가 아니라, 글로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과 영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이다. 이 책의 광고 카피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버락 오바마가 책을 읽고 말했다는 내용인데 “작품이 워낙에 거대해서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라는 문장이다. 그만큼 이 책의 내용이 ‘재미있다’가 아니라, 이 책이 다루는 사건의 규모가 탈지구급이라는 사실. 요지는 글이라는 도구는 무한의 영역까지 표현의 한계가 없지만, 영상으로 다루는 콘텐츠는 자본이라는 필수 조건과 함께 고려될 수밖에 없기에 작가의 상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가 공격받아 파괴된다”라는 문장엔 아무런 돈이 들지 않지만, 이 말을 영상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영화는 어물쩍
아버지의 오래된 책상. 아버지는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과 옥편을 찾아보면서 읽는 버릇을 들이라고 내게 말하곤 하셨다. 허진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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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잘 읽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책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마도 더 다양한 소재와 표현 방법을 가질 수 있다고 추론한다. 그런데 반대로 영상으로 잘 만들어진 콘텐츠만큼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선사하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한다. 글에는 내용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음향 효과나 연기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타나, 직관적인 연출이 들어가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정적이기 때문에 글자로 이루어진 작품은 그것만의 매력을 갖기 위해 부단한 진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문장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의 힘으로도, 연기자의 연기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의 힘. 예를 들자면 세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의 하나로 꼽히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을 완벽하게 연출할 수 있는 연출가와 연기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안나 카레니나’도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안나 카레니나’도 이 문장의 표현은 어물쩍 생략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카피라이터였다가 요즘은 디렉터라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연출가의 고민이 이해 된다. 도대체 몇 컷의 장면과 몇 개의 신(scene)이면 이 문장만큼의 여운을 남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연출가도 고민했겠지만, 어떤 매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문장만의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아직도 아버지가 나에게 줄기차게 “책을 읽으라”고 했던 말에 ‘그 재미없는걸 왜 읽어?’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분이 계시다면, 각각의 매력이 다 있는거니까 우리도 심심할 때, 마음의 양식을 위해 책이라는 걸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떠냐는 것이다. 몇 년만에 읽어본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는 주지 못하는 상상이라는 즐거움을 줬고, ‘책을 읽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구나’하고 느끼고 나니, 다른 책들도 하나씩 소소하게 읽게 되었다. 뭐니 뭐니해도 가을이지 않은가. 예로부터 말하는 독서의 계절이 무르익고 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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