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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천둥번개’ 같았던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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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2년 2월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측대표단 수석대표 정원식 국무총리(왼쪽)와 북측대표단장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나눠 갖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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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분야를 포함한 한국의 거의 모든 부조리의 근원은 분단에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분단의 원흉으로 미국이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단은 당시 상황에서 피할 수 없었고 미국의 전략은 바꿀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었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현재 진행형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남북의 파병(설)도 남북관계가 적대적이기 때문에 한반도 전쟁 위기로 연결되고 있지 않은가.



정부 수립 전후 국가 정책의 실패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뒤엔 그 전의 잘못된 것들이 더 구조화되었다. 남북 군사 대치는 날카로워지고 그 위에 독재 체제들이 뿌리를 내렸다. 상대는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고 또 그렇게들 대했다. 다행히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1992년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기본합의서’) 발효는 남북관계에서 일대 사변이었다. 필자가 그 몇년 후 국방부에 근무할 때 처음 ‘기본합의서’를 읽고 가슴 뛰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어떤 선배는 “민족의 대장전”이라 칭했다. 거기에 남북한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알알이 박혀 있고 이후 정상회담 합의들도 다 거기서 흘러나왔다.







“북한은 주권국이자 합리적 행위자”





‘기본합의서’는 ‘천둥번개’로 시작한다.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수구 냉전 세력들이 들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고 어찌하여 그 합의서가 보수 정부에서 만들어졌는지 종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북관계는 지난 30여년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내리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파탄 나고 윤석열 정부에서 파괴되었다. 한반도는 전쟁 위기 속에 던져졌다. (더 큰) 책임이 남과 북 어느 쪽에 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횡행하는 ‘두 국가론’의 유령을 쫓아내고 남북관계를 적어도 ‘기본합의서’ 수준으로 복원하려면 다시 그 ‘천둥번개’를 불러야 한다. 결국 이 땅의 영혼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와 통일 아닌가.



‘기본합의서’ 1조는 남과 북이 지키지 않을 ‘핑곗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서로’라는 단어다. 상대가 하지 않으면 나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제 이런 편협한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 그래서 그냥 북한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남한의 총체적 역량이 그럴 수 있을 만해지지 않았는가.



첫째, 북한은 하나의 주권국가임을 인정하자. 굳이 원한다면 ‘사실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도 있겠다. 북한 정권을 한반도 북쪽 지역과 주민을 불법으로 통치하는 ‘집단’으로 간주하면 남한에서 수많은 모순적 제도와 정책들이 온존하면서 스스로 발목을 붙잡게 된다. 서해 북방한계선은 헌법의 영토 조항과 배치된다.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우리 영토에 대한 핵 공격이 된다. 국가보안법을 두고 통일과 평화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대북 제재의 최종 피해자인 북한 주민은 곧 우리 ‘국민’이다.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장점을 살리면 남북 평화관계를 더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북한이 ‘합리적 행위자’임을 인정하자. 주권국가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국가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 있다. 북한이 사실상의 국가라고 현실적으로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정책은 항상 비합리적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만일 북한이 본성적으로 악하고 비이성적이고 심지어 미치광이라면 그들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예측도 대응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의 핵 정책, 군사력 건설과 훈련, 외교와 동맹 정책 등은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모두 나름의 합리적 판단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것에 대해 찬성 동조하거나 고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단 상대를 합리적 행위자로 인정해야 나의 합리적 대응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북한이 최우선적 대화와 협력의 상대임을 인정하자.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 전혀 접촉하지 않은 유일한 정부가 되어가고 있다. 시급한 한반도 전쟁 위기 해소에서 당사자인 북한보다 미국과 최우선으로 대화하면서 미국 말 듣고 일본과 미국-유럽 군사동맹인 나토(NATO)까지 끌어들였다. 허황된 “글로벌 중추국가” 광대놀음을 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화와 협력은 평화 공존을 포함하여 더 넓고 깊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남북 공영의 토대임은 과거 ‘좋았던 시절들’이 명백히 입증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을 자주적 평화통일의 동반자로 인정하자. 먼 미래의 일, 후대들의 몫일 수 있겠지만 미래의 목표는 현재의 과업을 결정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통일 아닌가. 함께 갈 길이지만 대한민국이 선도적 역할을 한다면 ‘사실상의 통일’은 현세대의 성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랜 금기 넘어서는 용기를





공적 차원에서 북한을 인정하는 것은 발언이든 정책이든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전쟁 위험성 제거(방울 달기의 목적)를 위한 대화의 전제 조건인 북한 인정(방울 달기)은 정치적 리스크의 두려움(고양이)을 이겨내야 한다. 여건은 예나 지금이나 좋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변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언론과 이익집단의 기득권 유지 노력은 멈추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행정부의 견제를 본령으로 하는 입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고 있다. 국회에서 북한 인정은 미국 비판과 함께 오랜 금기어였다.(불행히도 다른 중요한 것들에 대한 침묵도 관행이 되었다. 언론, 재벌, 사학, 종교, 지역 차별, 학벌주의, 의원 특권 등이다.)



정당과 정치인이 집권과 재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할 말을 제대로 못 한다면 곤란하다. 북한 인정에서는 그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다. 북한의 행동에 대해서는 ‘도발’ ‘규탄’ ‘강력 대응’ 등의 표현이 거의 무조건적인 여야 공용어가 되었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국회마저 행정부의 ‘2중대’로 전락한다면 결국 힘겹게 깨어 있는 시민들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는 할 말도 하고 표도 얻을 수 있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하고 시민과의 직접민주주의도 실천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문장렬 전 국방대 교수
노무현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 국방담당,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군사과학기술의 이해’ 등의 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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