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2 (토)

낟가리 모양 바위산에 불상이 차곡차곡... 중국 4대 석굴 맥적산[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50> 황하 답사 ② 맥적산석굴과 복희묘
한국일보

중국 간쑤성 텐수이에 위치한 중국 4대 석굴인 맥적산석굴. 서쪽 98굴 서애대불이 웅장한 자태로 새겨져 있다.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기 68년 불교가 처음 중원에 왔다. 최초로 설립된 뤄양의 백마사는 시작이었다. 중국의 사찰 숫자는 셀 수가 없다. 4세기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르자 석굴이 열렸다.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많았다. 수많은 불상과 벽화가 지금까지 보존돼 우리를 즐겁게 한다. 누군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을 추천했는데 50곳이 넘는다. 관광지로 이름을 떨치는 석굴을 다 모으면 수백 개는 되지 싶다.
한국일보

텐수이 맥적산석굴 전동차 승차장 입구.ⓒ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둔황 막고굴, 다퉁 운강석굴, 뤄양 용문석굴과 함께 4대 석굴에 이름을 올린 석굴이 있다. 신화 속 복희의 고향이라는 간쑤성 텐수이(天水)로 간다. 기원전부터 진주(秦州)라 불렸다.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50㎞ 떨어진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이 주인공이다. 입장권 사고 관광버스로 30분가량 이동한다. 다시 전동차 타고 10분을 달린다. 환경을 명분으로 대형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여행 비용이 오른다.

바위산 빙빙 둘러 221개 석굴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안내도.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보리 낟가리를 쌓아 놓은 듯한 모양의 맥적산석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텐수이 맥적산석굴의 서쪽 98굴 서애대불.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통통한 모양이 보리 낟가리처럼 생겼다. 빙빙 둘러 석굴을 팠다. 두루말이 펼친 듯한 평면도가 있다.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이 서쪽이다. 중턱에 서애대불(西崖大佛)인 98굴이 보인다. 북위(386~534) 시대 불상이며 끊임없이 보수했다. 가운데 불상이 12.2m다. 1978년 보수할 때 가슴 부위에서 292개의 동전으로 만든 목걸이가 발견됐다. 한나라부터 송나라까지 유통된 유물이었다. 오른쪽 보살은 형체가 사라졌다. 바위를 깎아 형체를 만들고 흙으로 감싼 제작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41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관람 동선은 1호선과 2호선으로 나눈다. 성수기에는 하나만 보여준다. 다 보려면 표 두 장을 사야 한다. 비수기에는 동선을 통합하기도 한다. 특별 석굴도 많아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크고 작은 석굴이 모두 221개다. 문으로 막고 철사로 촘촘하게 가리고 있다. 먼저 2호선 방향으로 들어서니 41굴이 나온다. 북주(557~581) 시대 굴착했다는 표시가 있다. 좁은 구멍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연꽃 위에 살포시 가부좌한 보살 윤곽이 겨우 보인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중칠불갈 9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중칠불각 9굴의 5불갈.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계단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니 9굴이다. 북주 시대 아치형 불감을 7개 뚫었다. 중칠불각(中七佛閣)이라 부른다. 불감마다 부처와 두 제자 또는 두 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5불감과 6불감 보살이 훼손돼 19개가 남았다. 부처의 생김새나 색감이 서로 다르다. 당시 시대상인 주원옥윤(珠圓玉潤)이 잘 반영돼 있다. 구슬인 양 둥글고 옥처럼 매끄럽고 색감도 단아하다. 참신한 매력이 느껴진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중칠불각 9굴의 4불감.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중칠불각 9굴 4불감의 가루라.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불감이 유명하다. 위쪽으로 날카로운 부리와 큰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새가 보인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가루라다. 금시조(金翅鳥)라고도 부르는데 호법신인 천룡팔부 중 하나다. 용을 잡아먹는다는 신공을 지녔다. 양 날개 끝에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고 다리는 새인 공명조(共命鳥)가 그려져 있다. 동자의 얼굴로 합장하고 있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인간을 상징한다. 부처의 광배에도 동자가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시선이 부처의 머리로 향하고 있다.

바위에 새기고 흙으로 빚고... 생명력을 불어 넣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동애대불 13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동쪽과 동애대불 13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올라가는데 웅장한 발이 보인다. 계단 하나 오를 때마다 몸매와 머리가 차례로 등장한다. 동애대불인 13굴이다. 수나라 시대 처음 만들었다. 산 아래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바위를 조각한 후 흙으로 빚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생명력이 느껴진다. 15.7m의 아미타불이다. 왼쪽 관음보살과 오른쪽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둘은 13m다. 서방 극락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가까이 가면 전체를 보기 어렵다. 대불 상부를 바라보고 뒤돌아 계단을 오르면 1호선과 연결된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3굴 천불랑.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높은 위치에 서니 약간의 공포를 느낀다. 울창한 수풀이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보이고 멀리 산능선이 이어지는 풍광이다.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천불랑(千佛廊)이라 부르는 3굴이 나타난다. 36.5m에 이르는 긴 복도다. 나무로 막고 철사로 가린 불상이 다닥다닥 붙었다. 역시 북주 시대 작품이다. 사람 인(人) 자 모양 불감에 297개의 부처가 조각돼 있다. 모두 결가부좌를 하고 있고 대략 1m에 미치지 않는 크기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4굴 상칠불각.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공 잔도를 따라가면 또 하나의 칠불각이 나온다. 상칠불각인 4굴이다. 북주 시대 진주 대도독 이윤신이 선친의 기복을 위해 만들었다. 길이 31.7m이고 높이 16m에 이르며 깊이는 13m다. 불감은 궁전처럼 만들어 대문과 기둥, 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부처와 두 제자, 6명의 보살이 자리 잡은 모양새다. 두 제자를 빼고 8명의 보살이 협시하기도 한다. 꽃 피는 동네도 아닌데 산화루(散花樓)라 부른다. 양쪽 끝에 연유가 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4굴 상칠불각의 산화루.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입구(동쪽)와 출구(서쪽)에 잘 단련된 근육과 매서운 눈매를 지닌 금강역사가 있다. 산 위로 부는 바람 따라 꽃잎이 휘날리는 장면이 연출됐다고 구전된다. 기록도 없어 정설은 아니다. 위쪽으로 자그마한 불감이 하나씩 있다. 초기 경전인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의 재가 제자인 유마힐 거사가 주인공이다. 천녀가 유마힐의 설법을 듣는 보살과 제자의 머리 위로 꽃을 뿌린다. 불법에 대한 아름다운 상징이다. 현실에서 흩날리는 꽃이어도 좋았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을 방문해 토론하는 듯 맞보고 앉았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4굴 상칠불각의 천룡팔부.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칠각이라 기둥이 8개다. 기둥마다 호법신이 조각돼 있다. 부처의 나라를 지키는 8명의 신이자 장군인 천룡팔부(天龍八部)다. 인도 토착신앙에서 불교로 흡입됐다. 김용 작가의 무협소설 제목과도 같다. 주요 등장인물을 호법신과 대비해 주목받았다. 법화경을 비롯해 불경에 자주 등장한다.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다. 소설 주인공 외우기도 어려운데 토착 신앙의 생김새까지 구분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름도 뜻도 아리송하긴 마찬가지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5굴 우아당.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5굴 우아당.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통로가 낮아 몸을 굽히고 쪼그리고 지나간다. 수나라(581~618) 시대 석굴이 나타난다. 15m 정도로 길지 않고 불감 3개인 5굴이다. 별명이 우아당(牛兒堂)이다. 한참 소를 찾는다. 바닥 쪽 철조망에 갇혀 있다. 천왕이 발로 꾹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여기저기 파인 상처가 있다. 늠름한 천왕을 보다가 소의 눈망울을 보니 가련하다. 살아서 불쑥 뛰어나올 기세다. 왜 순하고도 순한 소일까? 그 옛날 진주 일대에 지진이 많았다. 소가 진동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민간의 소망을 천왕이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의 관람 계단.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북위 석굴 147굴과 148굴.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위에서 아래를 보면 까마득하고 어지럽다. 아래에서 위를 보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어질어질하다. 지그재그로 움직여 서쪽으로 간다. 동쪽과 서쪽을,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서쪽 초입에 북위(385~534) 시대 석굴 두 개가 나란하다. 선비족 나라는 수골청상(秀骨淸像)의 예술미를 창조했다. 갸름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지만 해맑은 인상을 풍긴다. 147굴 틈으로 보니 수려한 부처가 미소 짓고 있다. 148굴도 엇비슷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한 분위기다. 북위가 만든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의 불상과 닮은 듯하다.
한국일보

맥적산석굴 서애대불을 발 아래에서 본 모습.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애석굴의 부처 발 밑을 통과한다. 정면만 보다 고개 똑바로 곧추세우고 보니 이상하다. 온정 넘치는 미소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짓누르는 압박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신도의 존경심을 간직한 때문일지 모른다. 석굴이나 사찰에서 만난 불상이 중압감을 주는 경우가 없다. 불심이 넉넉했다면 달랐을까? 그저 발품으로 역사와 문화를 찾아다닐 뿐이다. 아래로 내려와 바라보니 한결 편하다. 불심은 마음에 있다 했다. 존경심을 담아 다시 바라보고 반추한다.

중국인의 조상... 전설 속 제왕 복희의 고향?



한국일보

톈수이 복희묘 제사 광장.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음력 1월 16일이면 톈수이 시민은 제례를 올린다. 조상 중에 최초의 조상이라 할 복희가 태어난 날이다. 가장 존경받는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친근하게 런쭝예(人宗爺)라 부른다. 역사 이전의 신화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우기고 있다. 삼황이자 백왕(百王)의 선조라 여긴다. 중화문명의 기원이며 인문의 시조다. 팔괘를 비롯해 인간세상의 대부분을 창조했다. 출생이나 사망도 제각각 주장이 많다. 톈수이 시내에 신화처럼 등장한 복희묘가 있다. 제사 광장을 따라간다.
한국일보

복희묘 선천전 앞의 대형 향로.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텐수이의 복희묘 선천전.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복희묘 선천전의 '일화개천' 편액.ⓒ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전인 선천전(先天殿)에 이른다. 명나라 시대인 1484년 창건했다. 전각 이름이 선천이다. 주역에 따르면 역(易)에는 태극이 있고 양의(兩儀)를 생성한다. 양의는 하늘과 땅이다. 양의는 사상(四象)을 생성한다. 사상은 팔괘를 생성한다. 우주와 만물의 '생성 원리'인 선천팔괘라 한다. 복희가 창조했다. 후천도 있다는 말이다. 주나라 문왕이 우주와 만물의 '변화 원리'인 후천팔괘를 설명했다. 일화개천(一畫開天)이 걸렸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 필체였는데 문화혁명 때 소실됐다. 1988년 다시 명필을 가져왔다. 원나라 화가이자 서예가인 조맹부의 필체에서 골라 제작했다. 건괘(乾卦)는 곧 천(天)이니 첫 획으로 하늘을 열었다는 뜻이다.
한국일보

선천전의 복희 좌상.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m 높이의 복희가 좌정해 있다. 팔괘를 받쳐 들고 있고 눈빛은 섬광을 내뿜는 듯하다. 활활 불타는 광배라 더 그렇다. 용과 봉황을 수놓은 천이 에워싸고 있다. 녹색 바탕에 금빛으로 쓴 문명조계(文明肇啓)가 걸렸다. 서명이 있다. 청나라 가경제 시대 진주목사를 역임한 서예가 왕사균의 솜씨다. 조와 계가 모두 '개시하다'는 말이니 강조가 대단하다. 팔괘를 창조한 복희가 곧 문명의 시작을 알렸다는 믿음이다.
한국일보

복희묘 선천전 천장의 선천팔괘도와 육십사괘.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선천팔괘도를 그려 놓았다. 원 위쪽으로 표상인 건괘(☰)가 보인다. 방향으로 남쪽이다. 북쪽인 곤괘(☷)가 맞은편에 위치한다. 땅이다. 만다라처럼 사각형 안의 원으로 팔괘를 구현하고 있다. 바깥에는 육십사괘를 일일이 꾸몄다. 송나라 유학자 소옹이 지은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따르면 일분위이(一分爲二)다. 하나가 둘로 나뉘듯 계속 분열한다. 1, 2, 4, 8, 16, 32, 64에 이른다. 팔괘의 두 괘가 합쳐져 생성한 육십사괘로 천장을 꾸몄다. 선천전에서 만물을 쥐고 우주를 비행하는 듯하다.
한국일보

복희묘에 장쩌민이 쓴 '희황고리' 비가 세워져 있다. ⓒ최종명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뒤쪽 정자에 희황고리(羲皇故里)가 적혀 있다. 장쩌민 전 주석이 쓴 글씨다. 복희의 고향이라는 이야기다. 기록마다 고향을 비정하려고 애쓴다. 신화를 역사로 유인하려는 태도다. 북위 학자인 역도원이 수경주(水經注) 위수 편에 느닷없이 복희 고향이 톈수이라 기록했다. 장쩌민이 와서 결정타를 날렸다. 복희문화절을 지정하고 공식 제례도 거행한다. 신화가 무슨 상관인가? 국가지도자가 결정하면 곧 역사가 되는데 말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