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1451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신기전이라는 무기 7000발을 평안도에 보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중신기전(中神機箭) 3천과 소신기전(小神機箭) 4천을 평안도에 보내도록 명하였다.(命送中神機箭三千 神機箭四千于平安道)” -『조선왕조실록』 문종 1년 음력 1월 4일 6번째 기사
신기전은 화살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 조그마한 로켓 무기를 말한다. 조선 시대 초기는 이미 화약을 만들어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수준으로 정착되었던 시기다. 그 중에서도 신기전은 화약이 일으키는 빠른 화학 반응의 힘을 추진력으로 이용해서 하늘을 날아가는 무기를 만들어 사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소신기전은 활로 쏘는 화살 비슷하게 날아가는 비교적 단순한 무기다. 그에 비해 중신기전은 앞부분에 화약을 추가로 달아 폭발하며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현대의 로켓 무기와 상당히 비슷한 형태의 무기가 개발되어 실전 배치된 셈이다.
불꽃놀이 본 연암 “신기전 쏘는 것 같다”
영화 ‘신기전’의 한 장면.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내가 특히 관심 있게 본 것은 그 숫자다. 실록에 기록된 숫자는 조선의 임금님이 신기한 구경거리 삼아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날아가는 장치를 만들어 시험해 보았다는 수준이 아니다. 평안도 한 지역에만 7000발을 보냈다는 것은 군대에서 주력 무기 중 하나로 사용하기 위해 대량 생산을 거쳐 일선에 배치했다는 뜻이다. 아마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배치되었던 모든 신기전 생산량을 다 합치면 수만 발 단위의 숫자에 도달했을 것이다. 1451년이면 지금으로부터 573년 전의 옛날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세계에서는 로켓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본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았을 시대다. 당연히 로켓을 무기로 개발해 상시 배치한 나라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조선 사람들은 로켓 무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보급했다.
신기전은 그 시대에만 잠시 사용했던 무기가 아니다. 비록 세종, 문종 시대만큼 활발히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조선 시대 내내 신기전은 꾸준히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징옥이 다음과 같이 보고한 기록도 보인다. 이징옥은 수양대군에 대항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신기전(神機箭)은 적에 대응하는 데에 가장 긴요한 물건입니다.(神機箭 應敵最緊之物)” -『조선왕조실록』 문종 1년 음력 1월 8일 4번째 기사
흔히 조선 시대의 장군이라고 하면 힘이 세거나 칼싸움을 잘하는 것이 장기인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징옥은 아마도 로켓을 잘 다루는 것이 특기인 장군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신기전 사용 사례는 이어진다. 『열하일기』에는 18세기 박지원이 중국의 불꽃놀이를 본 뒤 주변의 조선 사람이 “신기전 쏘는 것 같다”고 평했다는 대목이 있다. 조선 후기에도 사람들은 종종 로켓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고 어느 정도 그 모습에 친숙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로켓은 한국의 옛 문화 속에 상당히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한국 전통문화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김장 김치만 하더라도 우리 곁에 등장한 건 대략 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고춧가루가 대규모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고, 김장 배추가 전래하여 널리 소비된 것도 조선 후기다. 비교해 보자면, 오히려 로켓이야말로 김장 김치보다 더 옛날에 나타나 더 오랫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있었던 전통인 것이다.
2013년 경기도 고양시 고양시정연수원에서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소 박사가 복원한 화차 신기전이 하늘을 날고 있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상한 비교이긴 하지만, 독일 맥주의 뿌리라고 하는 맥주순수령이 발효된 것이 1487년이다. 조선의 평안도 신기전 대량 배치보다도 더 후대의 일이다. 모르긴 해도, 독일 사람들이 맥주를 독일 문화라고 생각하는 만큼 조선 사람들은 로켓을 조선 문화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요즘 로켓이라고 하면, 아마도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발사하는 우주 로켓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 로켓을 친숙하게 여기는 전통문화로는 어느 나라 못지않은 곳이 한국이다.
그런데 왜 로켓과 같은 과학 기술을 우리의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현대 한국인들이 가장 가깝게 여길 역사가 조선 말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 말기 과학 기술의 발달에 뒤처져 열강의 침략을 받고 결국엔 나라를 잃었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가깝게 여기는 시대에 과학 기술이 뒤떨어졌으니, 은연중에 과학 기술은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 속에서 한국의 전통은 과학 기술과는 반대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제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도 좋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설령 현대 과학 기술로 당장 고려청자의 색깔을 흉내 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도, 고려 시대의 한국인들이 무슨 마법이나 주술을 이용해서 청자의 색깔을 만들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그 시대, 그 나름의 과학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일이지, 한국인의 전통은 과학 기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인간 생활의 모든 면이 항상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는 만큼, 긴 세월의 역사 속에서 변화를 겪어 온 한국인의 전통 속에도 그 시대, 그 나름의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21세기의 한국은 어느 정도의 로켓 기술은 보유한 나라다. 누리호 로켓을 성공시켜 세계에서 열 곳도 채 되지 않는 중형 인공위성 발사용 우주 발사체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거니와, 방위산업에서 무기로 사용하는 로켓과 미사일로 범위를 넓히면 이야기해 볼 만한 기술은 더욱 많다.
세계에 유례가 드문 초대형 탄두를 지닌 로켓인 현무V 로켓이 공개되었는가 하면, 천무라고 하는 다연장 로켓 무기가 소리소문 없이 사우디아라비아에 1조원 어치 이상 수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 국내 미사일 생산 회사가 비궁이라고 하는 소형 로켓 무기를 미군에 판매하는데 도전하고 있다고 해서 주식시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약에 미군이 어떤 무기를 정식 도입한다고 하면, 그 말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군대에서 그 무기의 성능이 상당히 검증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더 많이 팔릴 것이라는 짐작으로 주식 투자자들이 술렁거렸기 때문 아닌가 싶다.
로켓은 첨단 과학 비빔밥, 파급 효과 커
2023년 5월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한국형 우주 발사체 누리호가 발사되고 있다. [사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래를 본다면 이제 한국에서는 방위 산업 분야를 넘어 서서 우주 개발과 같은 순수 과학 연구 분야의 로켓 연구에도 좀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로켓과 같은 첨단 장비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 기술이 한 데 모여 연구되고 시험되는 첨단 과학 기술 발전의 비빔밥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로켓 개발 과정에서 다른 산업에도 잘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이 같이 개발되면서 그 나라의 과학이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무기 개발은 기밀 사업으로 남아 있는 영역이 크기에 어쩔 수 없는 여러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로켓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활발히 다른 영역에 공유되고 더 널리 응용되면서 경제와 산업에 좋은 영향을 주려면, 순수한 과학 연구 사업이 훨씬 더 유리한 점이 있다.
이웃 나라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에서는 이미 2020년에 하야부사 우주선이 우주 저편의 소행성에 가서 거기서 돌가루를 채취해서 지구로 가져오는 임무에 성공했고, 중국에서는 지난 6월 자체 개발한 우주정거장 톈궁이 완성되어 지금도 우주비행사들이 수시로 가서 머물고 있다. 한국의 우주 로켓 기술보다는 한참 멀리 앞서 있는 성과다.
만약 그 옛날 화약 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최해산이나 박강 같은 조선 시대의 과학 기술인들이 이런 소식을 듣는다면 한국의 로켓 전통을 지금은 일본과 중국이 차지했다는 느낌을 받을 거라고 나는 상상해 본다. 말하자면, 일본에서 판소리 명창이 나오고, 중국에서 무궁화 키우기가 유행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곽재식 작가·숭실사이버대 교수. 공상과학(SF) 소설가이자 과학자인 곽재식 작가가 세포부터 우주까지 전 영역에 걸친 과학 이야기를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 등을 쓴 곽 작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공학·화학을 전공했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