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장 |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9월, 기획재정부는 ‘원천징수 합리화’라는 낯선 대책을 내놨다. 간이세액표 개정을 통해 매월 떼어가는 근로소득세액을 줄여 가계 수입을 늘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랏빚을 내지 않고도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묘수’라는 호평이 부처 내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 대책은 곧 조삼모사 논란에 휩싸인다. 세금을 적게 내는 만큼 연말정산 때 적게 돌려받는다는 점에서 결국 납세자의 부담은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없는 살림에 마른 수건 쥐어짜 마련한 정책”이라며 둘러댔지만 사실 여기엔 차마 대놓고 밝히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선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경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었다.
보수 정권마다 반복되는 재정 꼼수
이런 꼼수는 다음 정권에서 급기야 큰 사달로 번졌다.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화려한 복지 공약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집권 첫해부터 세법 개정에 나섰다. 근소세 공제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한 것인데, “고소득자 부담을 늘렸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중산층과 봉급생활자가 내야 하는 세금이 대거 늘었다. 여론 반발에 직면한 정부는 “세율을 올리지 않았으니 증세가 아니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만 살짝 뽑았다”는 식의 말장난으로 오히려 월급쟁이의 분노만 키웠다.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거나 나랏빚을 더 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정공법 대신, ‘거위 털 뽑듯’ 슬그머니 직장인 유리지갑을 털 궁리만 한 것이다.
정부가 얕은수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일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기재부는 30조 원의 세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과 주택기금 등 각종 기금을 동원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정부는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병사 월급과 기초연금 인상, 신공항 건설 같은 선심성 대책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세수가 원하는 만큼 걷히지 않자 외환시장 안정과 서민 주거복지에 써야 할 비상금을 탈탈 털고, 한국은행에선 150조 원이 넘는 차입금까지 끌어다 쓰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러고도 “국채 발행을 피했으니 건전재정 기조를 지켜냈다”, “나랏빚 펑펑 내던 전임 정부와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홍보한다.
前정부 고용 부풀리기와 다를 게 뭔가
그러나 이런 자평과는 반대로 정부의 ‘재정 마사지’는 현 정부가 그토록 차별화를 시도했던 지난 정부의 데자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공공 일자리를 쏟아낸 결과 고용률이 올라가는 등 이른바 ‘겉모습’은 개선됐지만, 실제로는 저임금 비정규직만 잔뜩 늘어나면서 고용의 질은 추락했다. 돌려막기와 마이너스통장으로 겨우 파산을 면하고는 “나라살림을 튼튼히 지켰다”고 정신승리하는 것과, 예산 축내며 질 낮은 ‘세금 알바’를 양산해 놓고 자칭 ‘일자리 정부’라 치켜세우는 것. 그 둘을 지켜보며 국민들이 느낄 민망함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과속 인상과 일자리 증가라는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하려다 결국 통계 분식(粉飾)까지 감행했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우파 정부에서 유독 이런 ‘재정 꼼수’가 되풀이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건전 재정과 감세 기조가 집권 세력에 일종의 도그마(독단적 신념)가 된 상태에서 선심성 지출은 지출대로 하려다 보니 관료들이 이런 막다른 선택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건전 재정이라는 큰 방향은 옳지만 이는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하나의 원칙쯤으로 여겨야지 그 자체가 절대 허물어선 안 되는 성역이 돼선 곤란하다. 누구보다 대통령부터 그 고집을 내려놔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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