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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금)

[광화문에서/황성호]노인 서러운 노실버존… 결국엔 모두의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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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황성호 사회부 기자


1931년생으로 올해 93세인 일본인 다키시마 미카(瀧島未香) 할머니의 현재 직업은 ‘헬스 트레이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산 그가 운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한국에도 출판된 그의 책 ‘92세 할머니 기적의 근력운동’에 소개된 계기는 이렇다. 65세의 어느 날 집에서 과자를 먹던 그를 보고 딸이 “엄마, 요즘 살이 좀 찐 거 아냐?” 물었다. 이를 들은 남편이 다키시마 할머니를 끌고 스포츠센터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운동이지만 87세엔 헬스 트레이너가 됐고 책까지 냈다.

다키시마 할머니가 한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헬스장을 잘못 골랐다면 입구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을 수도 있다. 최근 이른바 ‘노실버존(No Silver Zone)’ 헬스장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층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울 강동구, 영등포구와 대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까지 나서서 ‘스포츠시설의 65세 이상 회원 가입 제한은 차별’이라며 시정하라고 권고했다.

노인의 가입을 거절하는 헬스장들은 “노인들이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을 노골적으로 본다” “다른 젊은 회원들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아서 불만 민원이 잦다” 등의 이유를 밝혔다. 헬스장이 회원을 늘리려면 젊은 회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져야 하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홍보가 돼야 하는데, 노인 회원들이 늘면 젊은이들이 기피하니 결국 헬스장이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한국의 인구구조를 고려하면 앞으로 이런 헬스장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통계청은 65세 이상 인구가 내년에 처음으로 한국 인구의 20%를 넘어선다고 전망했다.

노인을 받지 않겠다는 스포츠 시설들은 엄연히 개인의 재산권이 보장되는 사업장이다. 인권위 차원의 권고를 넘어 국가가 출입을 허용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국가가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스포츠 시설들이 노인을 환영하는 풍토를 만들 수도 있다. 한국보다 앞서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의 건강증진법이 좋은 사례다. 이 법은 질병 치료 및 예방을 위한 적절한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시설에 대해 세액공제 혜택을 준다.

이러한 지원은 비단 노년층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은 2028년이면 25조 원 규모의 적립금이 모두 고갈될 것으로 분석된다. 2032년엔 적자가 20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며 병원비가 가파르게 늘어나는 탓이다.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는 것이 근본적으로 젊은 세대의 주머니를 지키는 방법인 셈이다.

일본에선 다키시마 할머니를 보고 감명을 받아 운동을 하는 중장년층도 적지 않다. 일본 주요 매체도 그에 대해 보도하며 운동법 등을 기사로 다룬다. 47세의 사토 미치코 씨는 다키시마 할머니의 책에서 “언제나 해바라기 같은 다키시마 씨의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 할 수 있어!’ ‘도전해 보자!’ 하는 긍정적인 파워가 샘솟는다”고 했다. 헬스장이 노인들을 거부하면 이런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노인의 건강은 모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실버존 헬스장’으로 대변되는 세대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관계 기관의 고민이 필요하다.

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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