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 (사진=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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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앙리 드 지시가 그린 발레를 하는 루이 14세 (사진=gallica.bnf.f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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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의 빛과 그림자 ‘루이 14세’
일명 태양왕으로 불리는 루이 14세(1638~1715년)는 프랑스왕국의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72년 넘게 재위하면서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을 건설하고 재정과 군제 개혁을 실시해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 후 37년 간 계속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넓히고 프랑스를 복구해 왕권을 세운 위대한 군주였다. 그러나 빈번한 전쟁으로 불어난 재정난 때문에 프랑스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루이 14세는 왕권강화와 전쟁, 건축, 음악, 심지어 무용까지 다방면에 많은 업적을 쌓아 프랑스 왕 중에서도 대왕으로 불릴 만큼 우뚝한 인물이다. 심지어 음식과 관련된 행적까지도 요란해서 책 몇 권으로는 담기 어려울 만큼 일화가 많다.
우선 그는 어마어마한 대식가였다. 그의 제수였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 끼에 4종류의 수프, 꿩 2마리,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로 양념한 양고기 한 접시, 페이스트리 한 접시,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계란을 먹어 치울 정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하루 동안에 닭 50마리와 포도주 20ℓ(리터)를 먹어치웠다는 기록도 있다. 배가 가득 차면 손잡이가 달린 솔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토해내고 다시 먹었다니 참으로 엄청난 식성이 아닐 수 없다. 식사 마지막에는 항상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는데 마카롱과 소르베는 끼니마다 먹었다. 디저트를 코스 식사의 마무리음식 으로 하는 정찬, ‘오트 퀴진’(최고급 코스요리)의 기초도 루이 14세가 만든 것이다.
그는 베르사유 궁에 무려 2300개의 방을 만들고, 귀족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 궁에 들어가지 못한 귀족들은 그 인근에라도 거처를 마련하여 왕의 총애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귀족들을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 둔 그는 화려한 파티와 음식, 엄격한 궁중예절로 그들을 철저하게 다스렸다. 특히 식사 예절은 엄청나게 까다로웠다고 하는데, 그렇게 확립된 프랑스의 예절문화는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베르사유의 궁중 예절은 전 유럽 왕실의 표본이 되었고 나아가서 프랑스가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 14세의 연회는 무려 1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요리의 향연이었다. 그의 만찬에는 500명에 달하는 귀족들이 시중을 들었는데, 그 식사광경을 일반시민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관중들은 루이 14세의 삶은 계란 까먹는 모습을 우아하다고 매우 좋아했다는데, 그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식사 끄트머리에 계란을 5개나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일상조차 정치 도구로 활용한 루이 14세는 요즘 말로 ‘관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왕립요리학교도 설립해 궁중요리를 발전시키고 음식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왕립요리학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리법을 수집하여 요리책을 만들었다. 오늘날 프랑스가 가장 많은 요리책과 레시피를 보유한 국가가 된 것은 그 학교의 업적이다. 프랑스요리가 세계미식의 정점에 서게 된 것도 루이 14세의 기여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계란 (사진=게티 이미지 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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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롱 (사진=게티 이미지 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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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
루이 14세를 태양왕이라고 부르게 된 건 다름 아닌 발레공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한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원했다. 그는 절대왕정 수립을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당시 인기 있는 공연물이었던 발레를 선택했다. 7살 때부터 발레를 배웠는데 매일 두 시간씩 열심히 수련해 나중에는 그 실력이 전문무용수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루이 14세는 15세가 되던 1653년에 ‘밤의 발레’라는 공연에 주인공 태양신 아폴론으로 출연한다. 공연의 줄거리는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는 것으로, 아폴론으로 분장한 루이 14세는 금박을 입힌 화려한 장식으로 태양처럼 빛났다. 공연내용에 의도적으로 귀족들이 아폴론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모습을 넣어 관객들에게 왕권의 권위를 은연중에 각인시켰다. 공연이 끝날 무렵이면 관객들은 그를 향해 “태양왕 만세!”를 연호했다.
그 공연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온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미지를 창조했고,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발레를 입지를 강화하는 통치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는 30대 초반 까지 무려 27편의 발레 공연에 출연했다. 루이 14세는 1661년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발레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1669년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신인 왕실음악학교까지 건립, 발레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간 발레는 루이 14세의 공헌으로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현대무용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이다.
왕권확립에 대한 그의 집착은 프롱드의 난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있다. 루이 14세는 불과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5년 뒤 귀족들이 일으킨 프롱드의 난으로 파리를 떠나야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그도 반란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때 귀족들로부터 당한 수모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훗날 루이 14세가 쓰라린 추억이 있는 파리를 피해 베르사유에 엄청난 규모의 궁을 건설한 것도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곳에 귀족들을 불러모아 엄격한 예절을 강요하고, 발레를 통해 자신을 태양왕으로 만든 것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가 아침 식사로 음식을 18접시, 저녁 식사에 30접시나 먹는 대식가가 된 것도 피난시절 굶주림을 경험한 탓이라는 해석까지 있다.
심장 (사진=게티 이미지 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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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식가였던 루이 14세, 말년은 종합병원이었다
루이 14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다. 그가 죽고 나서 부검을 했던 의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위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이상으로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음식과 달콤한 디저트를 마구 먹어댔으니 건강상태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중년 이후에는 중풍과 소화불량, 위염, 장염, 당뇨, 치통, 편두통, 통풍 등에 시달렸다. 시쳇말로 종합병원 신세였다. 치통을 호소하는 루이 14세에게 시의(궁중의사)는 치아를 전부 뽑아버릴 것을 권했다. 마취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고통 속에 발치했는데 그나마도 시술 결과가 좋지 않아 아래턱은 금이 가고, 입천장에는 구멍이 생겼다. 그는 음료를 마실 때마다 코로 그것들이 새어나오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가 없으니 식사는 유동식으로 바뀌어야 했고, 무리한 치루수술에다 통풍까지 덧나서 말년에는 거의 누워 지내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76세까지 살았으니 생활의 질은 형편없어도 장수는 한 셈이다.
믿기 어렵고 괴이하지만 흥미로운 루이 14세의 사후 이야기가 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심장은 방부처리 후 보관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실의 유물을 처분하던 이들이 그것을 헐값에 팔아치웠다. 그 심장이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건너가 의사인 프랭크 버클랜드의 손에 들어갔다. 버클랜드는 기이한 음식을 찾아다니는 괴식가로 유명했는데 그가 루이 14세의 심장을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맛은 없고,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생겼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런 풍문이 사실이라면 루이 14세의 기구한 운명은 탐식가의 업보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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