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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토)

[매경춘추] 물건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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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요컨대,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꺼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버리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옷만 그런 게 아니다. 제빵기(딱 한 번 사용하고 그 후로는 뚜껑도 안 열어봤다), 다리 마사지기(별 효능도 없다), 염색약(포장도 안 뜯었다), 더 이상 안 쓰는 선글라스들, 끝도 없이 모아둔 쇼핑백, 왜 있는지 모를 보자기 뭉치, 용도를 알 수 없는 어댑터, 기타 등등….

최근에 이사를 한 후, 더 이상 이래선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런 식으로는 이 집 안의 혼란스러운 기운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옷부터 버리기로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옷장 밑바닥에 잠들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운명인 옷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 옷이 입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 어쩐지, 그런 순간이 기필코 올 것 같았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옷들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직 버릴 물건들이 많았으니까. 우선 다리 마사지기. 효능은 별로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보관. 쇼핑백, 이건 정말 쓸 일이 많잖아. 그러니까 보관. 보자기는? 이런 게 은근 필요할 때가 있다니까? 이것도 보관. 선글라스는? 유행은 돌고 도는 건데, 이걸 버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아, 이게 핵심인 것 같다. 이 감정이야말로 버려야 할 물건들을 앞에 두고 내가 벌이고 있는 이 기묘한 행각의 핵심이었다. 내가 버리고 싶은 것,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은, 먼 훗날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었다.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고 한숨이 터져나올 순간이었다. 어쩌면 물건을 잘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은 후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과거에 내가 그 물건을 버렸어. 버리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버린 거잖아.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그들은 그냥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 것이다.

부러워라! 그런 자질을 타고나는 건지, 후천적으로도 획득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버려야 할 물건들을 앞에 두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후회라는 감정에 쉽사리 굴복하는 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진짜 버려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 그러니까 그러한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그래서 내가 뭐든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뭐? 그렇게 뭐든 버리지 못하는 나를 버리는 것, 그래서 더 이상 전전긍긍하지 않는 내가 되는 것. 이게 정말 내가 바라는 건가? 더 나은 내가 되는 건가?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내가, 내 안에 있는 그 조그만 내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진다. 걱정 마. 버리지 않아. 아무리 못나도. 그런 생각을 하자, 우습게도 조금 속이 시원해졌다. 참나, 그런 것에 비하면 물건을 버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건들을 다 잘 버렸느냐고? 흠 그건 노코멘트하겠다.

[손보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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