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극심한 인플레에 고통… 국민들 정권 심판론 커져
美·日·英·佛 등 여당 패배, 세계 정치 지형 뒤바뀌어
점점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 속에 국가마다 내부 정치의 사정은 다소 달랐지만, 지난 수년간 유권자의 마음을 집권당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공통의 악재는 인플레이션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7일 미 대선 결과를 분석하며 “유권자들은 2021년 여름 시작된 폭발적 인플레이션에 대해 (여당인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2020년 확산한 코로나 팬데믹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각국 정부의 막대한 돈 풀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등 두 개의 전면전이 촉발한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은 최근에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년간 전 세계에 이어진 뜨거운 인플레이션과 힘겨운 민생은 민심을 정권에서 떠나게 했고, 결국 주요국의 정치 지형도를 바꿨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각국 선거에서 여당의 패배 원인을 분석해보면, 국민의 물가 상승에 대한 분노가 공통으로 언급된다”며 “‘물가를 이기는 정권은 없다’는 오랜 격언이 올해 세계 각국의 선거를 통해 증명된 셈”이라고 했다.
여당인 민주당의 참패로 ‘수퍼 선거의 해’를 마무리한 미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민주당 정권을 심판한 가장 큰 원인으론 경제난, 그중에서도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고를 유발한 인플레이션이 꼽힌다. 투표 종료 직후 발표된 CNN의 출구조사는 이런 흐름을 뚜렷이 보여준다. 미국 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응답한 투표자가 67%를 기록, ‘좋다’고 응답한 비율(32%)을 35%포인트 차로 크게 웃돌았다. 고물가에 고통받았다고 답한 비율은 75%나 됐다. 45%는 4년 전보다 재정 상태가 나빠졌다고 밝혔다.
그래픽=백형선 |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는 조 바이든 정부가 미국 경제의 부활을 이끌었다고 주장했지만, 인플레이션 앞에서 다른 경제 성과들은 외면당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물가를 제외한 미국의 다른 경제 지표들이 준수한 편이었는데도 민심은 싸늘했다. 지난 3년(2021~2023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4%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트럼프 1기(2017~2021년) 때인 1.5%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의 성장률이다. 실업률도 4%를 밑돌며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가파른 물가 상승률은 국민의 실질적인 구매력에 타격을 주면서 이런 모든 성과를 지워버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5월 사설을 통해 “미국은 카터 이후 6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낮은 인플레이션에 익숙해져 있었다”라며 “갑자기 바이든 아래서 물가가 급등한 점이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임기 동안 미국의 물가는 연평균 5.5% 올랐다. 이는 지미 카터(1977~1981년 재임) 전 대통령의 10.3%에 이어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민주당인 카터는 1980년 치러진 선거에서 공화당인 로널드 레이건에 선거인단 489명 대 49명으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 대선은 미국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고 이후 12년 공화당의 장기 집권으로 이어진 계기가 됐다. 레이건은 대선 유세 때 “인플레이션은 노상 강도처럼 폭력적이고 저격수처럼 치명적이다”라며 카터를 공격해 높은 물가와 이를 잡겠다며 연방준비제도가 끌어올린 높은 금리로 고통받는 유권자들의 분노를 자극해 성공했다.
지난달 27일 있었던 일본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자 보수주의 정당인 자민당이 단독 과반 의석을 지키지 못하며 참패한 배경에도 고물가로 인한 불만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지난해 3.3%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물가가 급등한 1982년(3.1% 상승) 이후 가장 큰 상승 폭으로 기록됐다. 일본이 수십 년 동안 저물가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민이 느끼는 고통은 더 컸다. 특히 최근 이상 기후에 일부 사재기와 관광객 증가가 겹치며 쌀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쌀값이 지난해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지난 7월과 8월 각각 총선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도 사정이 비슷했다. 영국의 리시 수낙 전 총리,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 때문에 정치적 수세에 몰리자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민자 문제, 무리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따른 후유증(영국), 연금 개시 시점을 2년 늦추는 국민연금 개편에 대한 반발(프랑스) 등 양국 정부가 국민의 외면을 받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핵심은 물가 문제였다. 두 나라는 코로나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직격탄을 맞아 극심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다. 야당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부의 ‘물가 실정(失政)’을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호응을 얻었다.
강경 보수 정권이 안정적으로 집권해온 이란에서는 지난 7월 전임 대통령의 사고사(死)로 치러진 대선에서 개혁 성향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당선됐다. 이란은 핵 개발에 따른 미국 등의 강력한 제재로 물자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지난 3년간 물가 상승률이 40% 안팎으로 치솟고 민생이 파탄 난 상태였다. 서방과의 갈등을 부추기는 강경 보수 후보 대신 “서방과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난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페제시키안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민주화의 아버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배출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1994년 이후 줄곧 집권해 온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고물가, 높은 실업률과 빈부 격차 등 경제 문제가 부각되며 40년 만에 처음으로 ANC가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올해는 아니지만 앞서 지난해 11월 대선을 치른 아르헨티나도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정권 교체의 촉매가 됐다는 평가다. 좌파 페로니즘(대중 영합주의) 정부 집권 당시 지나친 돈 풀기 정책으로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지난해 물가 상승률은 211%까지 치솟았다. 민생고에 신음하던 아르헨티나 국민은 극단적인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지난 정부가 남발한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싹 거두겠다고 선언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선택했다. 지갑에 꽂히는 보조금보다는, 인플레이션 해소가 유권자들에겐 더 급했던 셈이다.
미국 정치컨설팅 기업 유라시아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197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57건의 인플레이션 충격 이후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된 비율은 약 60%로 나타났다. 이 조사를 진행한 로버트 칸 유라시아그룹 전무는 “많은 국가에서 1970~1980년대 이후 본 적 없는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겪었고, 이는 정부에 압박을 가하면서 유권자를 불행으로 몰고 갔다. 이런 충격에 직면한 사람들은 좌파·우파를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쪽을 징벌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이 체감하는 경제적 고통이 강할수록 선거에서 집권 세력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다른 경제적 성과가 아무리 많았더라도, 결국 물가를 잡지 못하면 민심을 잃게 된다는 점이 올해 선거들을 통해 또다시 증명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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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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