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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노인 버리는 산' 악명 높은 곳…의사가 흰 가운 벗자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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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軽井沢)역 인근의 ‘홋지노롯지(ほっちのロッヂ)’ 진료소.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전원주택 같았다. 내과·소아청소년과가 있고 방문간호 서비스를 제공한다. 1층엔 가정집처럼 큰 부엌이 있고, 한 쪽에 장난감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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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문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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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도 사뭇 다르다. 의사 3명과 간호사 5명이 근무하는데, 모두 일상복 차림이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없다.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공동대표는 “진료받을 때 환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오가는 커뮤니티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병원처럼 느껴지지 않다 보니 인근 초등학생들이 방에서 놀고, 고령 환자와 얘기를 나눈다. 이곳에선 방과 후 교실도 열리고 장애 아동 치료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 진료소는 지역 내 ‘방문 간호’를 담당한다. 진료소는 병원 인근 16㎞ 이내 약 150명의 재택 환자들과 계약해 한 달에 2~3회 의사와 간호사가 방문한다. 2020년 개원 이래 4년 간 4000여명이 진료를 받았다. 가루이자와 주민 5명 중 1명이 이용한 것이다. 사토코 대표는 “고령자를 방문해 증세를 관찰하고, 악화 조짐이 보이면 인근 종합병원으로 안내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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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노현의 사쿠시의 사쿠종합병원. 문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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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현의 방문 진료 문화는 현 내 최대 병원인 사쿠(佐久)시의 사쿠종합병원에서 유래했다. 1960년대 사쿠시 주민들은 뇌출혈 사망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빴다. 해발 800m 산간지역의 추운 날씨와 짜게 먹는 습관 때문이었다. 산림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지형 탓에 의료기관 접근성이 떨어졌다. 노인을 갖다 버리는 산이란 뜻의 ‘우바스테야마(姨捨山)’란 악명이 붙을 정도였다.

사쿠종합병원에 부임한 와카쓰키 도시카즈(若月俊一·1910~2006) 원장이 ‘예방은 치료를 이긴다’는 신념으로 방문 진료를 시작하면서 사쿠 노인 건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와카쓰키 원장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의사의 왕진과 간호사의 간병을 묶는 방문 진료를 다녔다. 병원 밖에 방문간호시설을 하나 둘 늘리면서 현재는 인구 10만 명 작은 마을에 사쿠종합병원 산하 이런 시설만 모두 5곳이다. 주민들은 이 곳에서 병원을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시설을 방문해 진단을 문의하거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10년 전부터는 재택 의료와 방문 간호를 연계한 지역포괄케어시스템도 본격화했다. 특히 책임간호제를 실시해 노인 1명당 간호사 1명이 전담해 퇴원부터 방문 진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사토 후미에(佐藤史江) 간호사는 “일본에는 다다미(たたみ)방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문화가 있다”면서 “퇴원 환자 집으로 간호사가 오니 주민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사쿠시의 의료·돌봄 서비스가 일본 곳곳에 퍼지면서 일본인이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비율은 2005년 79.8%에서 2020년 68.3%로 감소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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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노현 사쿠시 사쿠종합병원의 우스다건강관(지역포괄케어센터). 문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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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시의 통합 의료 체계의 배경엔 풍부한 의료 인력이 있다.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사쿠시 주민 가운데 의료계열 종사자만 20%에 달한다. 인구 10만 명당 의사는 382명으로 전국 평균인 256명보다 100명 넘게 많다. 이성한 사쿠대학 인간복지학부 교수는 “의사가 사쿠시에서 의술을 배우고 다른 지역에 가도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전했다. 사쿠시 노인들이 살아있을 때는 왕성하게 살다가 숨을 거둘 때는 한순간에 죽는다는 뜻의 ‘핀핀코로리(ぴんぴんころり’의 대명사가 된 이유다.

내년 65세 인구가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를 맞는 한국이 참고할만하다. 유애정 건강보험연구원 통합돌봄연구센터장은 “사쿠시는 재택 의료·노인 돌봄 연계가 가장 잘 된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보건복지부가 통합돌봄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시스템 구축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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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2023년 노인실태조사 따르면 노인의 절반 이상(53.9%)은 재택 임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동이 불편하더라도 살던 집에서 계속 거주를 희망한다고 응답이 56.5%이다. 이런 바람과는 달리 지난해 사망자의 75.4%는 의료기관에서 숨졌다. 재택 사망은 15.5%에 불과하다. 2019년 이후 재택 사망이 조금씩 증가하다 지난해 다시 꺾였다. 다른 국가의 병원 사망률은 네덜란드 29.1%, 스웨덴 42%, 영국 49.1%이다.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의료·돌봄 통합시스템 구축에 나서고 있다. 2026년 3월 시행 예정인 돌봄통합지원법을 앞두고 지난해 6월부터 12개 지자체에 예산을 지원해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노인이 살던 곳에서 지역사회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의료·돌봄을 통합해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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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디자이너



지난 8일엔 기술지원형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지자체의 수를 현재 20곳에서 30곳으로 확대 추진하기로 했다. 해당 사업은 예산 지원은 없지만 대상자 발굴을 위한 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고 컨설팅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장영진 복지부 의료 요양 돌봄 통합지원단 단장은 “통합돌봄법은 초고령사회에 대비해 노인이 살던 곳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위해 제정했다”면서 “일본을 참고해 통합돌봄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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