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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113년 만에 완전체 된 지광국사탑…“늙은 부모님 고향집 모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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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복원 공개

일제 반출 후 11번 해체 끝에 원주서 '우뚝'

이태종 학예사 "사자상까지 되찾아 감격적"

중앙일보

일제강점기인 1911년 반출됐디기 113년 만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12일 강원도 원주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완전체로 모습을 드러낸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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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11년 반출됐던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하 지광국사탑)이 113년 만에 고향인 원주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경복궁 야외에 서 있던 것을 2016년 보존처리를 위해 해체한 뒤 8년 만이다. 높이 5.39m, 무게 39.4톤에 달하는 이 탑은 고려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난 걸작으로 불린다.

“마치 늙고 병든 부모님을 10년 정도 치료해서 편히 고향집에 모시는 기분입니다.” 12일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하 연구원)과 원주시가 공동으로 개최한 복원 기념식이 열린 날. 행사 참석에 앞서 연구원에서 지난 10년 간 지광국사탑 보존·복원을 담당한 이태종 학예연구사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원주로 탑의 부재(部材, 건축물의 뼈대가 되는 요소)를 실어보낸 뒤 탑의 건립장소를 수시로 방문하며 마지막 조립 순간까지 꼼꼼히 살폈다.

Q : - 원주까지 갔는데 탑의 원래 자리인 법천사 터가 아니라 전시관에 두는 이유는.

“사람으로 치면 노인인 데다 여기저기 병들고 아팠던 탑이다. 오랜 세월 풍화를 겪은 데다 앞선 수리 과정에서 사용된 시멘트로 인해 탑 부재들의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2022년 12월 전시관이 준공되면서 탑을 둘 자리가 확정됐다. 북쪽으로 난 통창을 통해 약 400m 떨어진 법천사 터의 지광국사탑비가 한 눈에 보이는 위치라 두 국보가 100여년 만에 상봉한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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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1911년 원주에서 반출된 직후 모습(왼쪽)과 2016년 보존처리를 위해 해체되기 전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뜰에 서있던 모습. 사진 국가유산청,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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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보존처리로 달라진 것은.

“부식되고 상한 부재들을 상당부분 신석재로 교체했다. 옥개석 같은 경우엔 48%, 즉 절반을 새 돌로 이어 맞췄다. 탑의 사면을 장식한 부조(浮彫, 도드라진 조각)들도 국가무형유산 이재순 석장 등의 솜씨로 원형에 맞게 복원했다. 무엇보다 사자상 4개까지 끼워맞춰서 ‘완전체’가 됐다.”

이 사자상들은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 속에선 탑 하층 기단석 네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7년 수리 복원 후 행방이 묘연해졌고 반세기 이상 탑과 분리돼 있었다. 이태종 학예사는 2015년 학술논문 등을 뒤지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사자상이 있다는 걸 밝혀내 이번에 제 모습으로 돌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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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강원도 원주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열린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복원 기념식에서 원정사 정념 스님, 최응천 국가유산청장, 임종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장, 원강수 원주시장(앞줄 가운데 성인들, 오른쪽부터)이 탑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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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석탑’으로 불리는 지광국사탑은 1085년(고려 문종 24) 승려 해린(984~1070, 지광국사)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국사의 업적과 생애, 탑 조성 경위 등을 새겨 놓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와 함께 수백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11년 일본인에 의해 무단 반출돼 경성(서울)의 병원 정원을 장식했고 이듬해 일본 오사카에 반출됐다가 비난이 일자 되돌아왔다.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 유물로 경복궁 야외에 서 있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1만2000개 파편으로 쪼개지는 참화를 겪었다.

1957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복원됐지만 당시 사용재료의 한계로 탑의 표면이 부식되고 장식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경복궁 안에서 자리를 옮기다가 2015년 해체·보존처리가 결정됐다. 이를 포함해 총 11번 해체되는 사이 원주→명동→오사카→경복궁→대전(연구원)→원주 등 1975㎞에 걸친 유랑을 했고 마침내 12번째 제 모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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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년 만에 원주로 돌아가 제 자리를 찾은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하 지광국사탑) 앞에서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이태종 학예연구사(오른쪽)가 포즈를 취했다. [사진 이태종]



Q : - 탑을 세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실내에 탑을 세우는 것 자체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먼저 전시장 바닥에 탑의 하중을 버틸 수 있는 면진대(免震臺, 내진 장치)를 깔고 받침돌을 올린 뒤 그 위로 탑을 층층이 쌓는다. 평평한 면진대와 울퉁불퉁한 지대석 바닥면이 이가 딱 맞물리듯 빈틈이 없어야 하는데 이 완충구조를 만드는 게 전체 공정의 40% 가까이 차지했다. 연구원 내 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와 국내 업체가 협력해서 진도 7의 충격에도 버틸 수 있게 완성했다. 원전(原電) 같은 공업시설이 아닌 문화유산으로는 우리 기술로 해낸 최대 규모 성과다.”

Q : - 완성된 탑을 본 소감은.

“국립고궁박물관 앞에 서 있던 걸 해체할 때만 해도, 이 부재들을 어떻게 조심스레 보존처리하나만 고심했지 새로 세워진 모습은 상상도 못했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놀란 게 그 단단한 화강암을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속까지, 예컨대 옥개석(지붕돌)의 안쪽 면까지 섬세하게 조각해 놨단 점이다. 그야말로 감탄스러운 정성과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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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하 지광국사탑) 보존처리 및 복원에 10년간 매달린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이태종 학예연구사. [사진 이태종]


대학에서 석조 보존처리를 전공한 이 학예사는 불국사 다보탑 및 경주 감은사탑 보존처리 등에 참여했고 2010년 연구원에 입사했다. 지난해 12월 경복궁 담장 낙서 테러 때도 대전에서 출동해 엄동설한 속에 현장 실무를 총괄했다.

“경복궁 낙서를 지우던 그 시기에 지광국사탑 복원 위치를 결정하는 위원회 보고서도 같이 만들었죠. 우여곡절 끝에 우리 손으로, 우리 기술로 다시 세운 지광국사탑이 제 자리에서 편히 안식을 취할 수 있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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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11년 반출됐디기 113년 만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12일 강원도 원주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완전체로 모습을 드러낸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오른쪽 통창을 통해 약 400m 떨어진 법천사 터의 지광국사탑비가 한 눈에 보이게 된다. 사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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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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