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제를 실시한 지 1년쯤 지난 2019년 이런 호기심을 글로 쓴 적이 있다. '개인이 야근을 하면서 경험했을 몰입의 경험은 정규 근무 시간대로 이동했을까, 아니면 상당 부분 손실됐을까. 손실됐다면 그 사회적 총합은 얼마일까.' 칼퇴근이 개인과 사회의 성취에 미칠 부작용을 염려한 글이었는데 댓글 반응은 그저 그랬다.
5년이 더 지난 지금 한국 제조업, 특히 반도체 경쟁력을 갉아먹는 주범으로 초일류 인재의 이공계 기피와 함께 주 52시간 근무제가 지목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공대에 가는 일류 인재가 줄었으니 일류의식을 가진 이공계 종사자도 같이 줄었을 것이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에 아랑곳없이 스스로 기준에 맞춰 일하는 것이 일류의 노동윤리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일류가 52시간을 넘겨 일하면 보상은커녕 사업주를 벌하는 제도다. 가뜩이나 일류도 줄었는데 '시키는 만큼만 일하는' 이류의 노동윤리에 그들을 가두고 있다.
우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가지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러브콜을 보내는 조선업이 있고, '가성비 갑' 방산도 있고, 잘 달리는 현대차도 있고, 캐즘에 고생하지만 그래도 배터리 최강국이기도 하다. 이걸 우리 세대의 공로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기업도 그렇지만 국가의 투자와 성취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SK하이닉스의 HBM에 10년의 시차가 있었다면, 한 국가의 야심 찬 설계가 빛을 발하는 데는 한 세대가 필요하다. 2024년 우리가 누리는 것은 공대에 최고 인재가 몰리고, 그들이 기업에 들어가 밤새워 일한 시대에 뿌린 투자의 결과물이다. 2054년의 대한민국이 수확할 열매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슨 씨앗을 뿌리고 있나.
정부가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의대 정원을 늘리는 진짜 이유는 일류 인재를 다시 공대로 돌려놓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응급실 뺑뺑이' 정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이 홍역을 치러야 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존재 기반인 제조업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아무리 저항이 심해도 '일등 의대'를 '일등 공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참에 주 52시간 근무제도 좀 손봤으면 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산업 경쟁력에 그치지 않는다. 중·장년 세대 대부분은 '몰입 노동'의 경험이 있다. 프로젝트 마감은 다가오는데 결정적 허들을 못 넘고 있다. 며칠째 잠을 설치며 몸과 정신이 한계에 이른 찰나 무슨 계시처럼 해법이 떠오른다. 순간 고통은 증발되고 삶은 충일해진다. 그 경험의 유무, 횟수에 따라 인생의 밀도가 달라진다. 오후 6시 퇴근과 동시에 '워라밸'로 이동하는 삶에선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1982년 매킨토시 컴퓨터를 개발하던 스티브 잡스는 '주 90시간 근무, 너무 행복하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일했다. 그는 56년을 살다 갔지만 그처럼 밀도 있게 산 인류는 거의 없다.
모든 사람이 잡스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일류가 되고 싶은 야심가에게는 일류의 문법이 허락돼야 한다. 미국, 일본 등이 우리보다 인권의식이 덜해서 '화이트칼라 주 52시간 근무 면제 조항'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엔 직업의 성취가 곧 행복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별도 규정을 두는 것이야말로 개인과 사회가 윈윈하는 길이다. 개인의 몰입 경험이 모이면 조직의 창의가 되고 그런 조직이 많은 나라는 부강해진다.
존 고든은 베스트셀러 '에너지 버스'에서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 소망하고 이루고 싶은 것은 모두 오르막이다. 문제는 사람들 대부분의 꿈은 오르막인데 습관은 내리막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개인의 오르막 오르는 습관을 장려하지는 못할지언정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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