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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친구 0명, 전화도 한달 한번…관계빈곤, 가난만큼 무서운 이유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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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지난해 12월 서울 동대문구의 한 1인 가구를 방문해 건강 음료를 전달하고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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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화해 준 게 고맙지요."

광주광역시 서구 정종문(53)씨는 11일 오후 기자의 전화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전화가 올까 말까 한데, 기자의 전화가 오니 반가웠던 모양이다. 정씨는 2017년 6월 뇌출혈로 쓰러져 우측이 마비된 후 요양병원 세 곳을 전전했다. 지난해 6월 5년 넘는 병원 생활을 접고 지금의 임대주택으로 나왔다. 정씨는 친구도 이웃도 없다. 전화나 카카오톡 통화하는 사람도 없다. 월 1회 딸의 전화가 전부다.



"뇌출혈 또 오면 어쩌나"



하루에 1~2시간 걷고, TV를 보거나 잔다. 복지관에 가기에는 너무 젊다고 여긴다. 종교 활동도 생각이 없다. 정씨는 "처음에는 외로웠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다"며 "교회 같은 데서 나 같은 사람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일한 말벗은 월~금요일 찾아오는 장애인 활동보조사이다. 보조사가 점심을 챙겨준다. 저녁은 혼자 먹는데,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주말에는 완전히 혼자다. 다행히 우울 증세는 없다.

두려운 게 있다. 뇌출혈 재발이다. 정씨는 "뇌출혈이 온 사람에게 또 올 확률이 높다는데,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정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다. 몸이 성하지 않아 일하기 어렵다. 기초 수급비·장애연금 70여만원으로 빠듯하게 산다. 그에게 경제적 빈곤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관계 빈곤'이다.



가족·친구 왕래 단절 증가

국민 20% "도움 받기 불가"

고령·저소득일수록 심해

"도서관을 지역 중심으로"

1인 가구, 독거노인, 고독사, 고립 청년…. 미디어에 쏟아지는 단어들이다.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의 삶을 대표한다. 통계청 사회조사(2023년)에 따르면 몸이 아파 집안일을 부탁해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경우가 26%이다. 우울해서 얘기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응답자가 20.2%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연령이 높을수록 더 높다. 월 소득 100만원 미만은 35.9%, 600만원 이상은 13.9%이다. 65세 이상 노인은 28.3%, 20대는 14.4%이다.



주1회 친인척 왕래 15년새 11%→3%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노인실태조사(2023)에 따르면 가장 많이 접촉하는 비(非)동거 자녀와 주 1회 이상 왕래한다는 노인의 비율이 22.7%에 불과하다. 15년 전에는 37.6%이었다. 형제·자매를 포함한 친인척 왕래 비율은 15년 새 10.6%에서 3%로, 친구·이웃·지인 왕래는 78.4%에서 59.7%로 줄었다. '1순위 여가 활동'으로 종교 활동을 꼽은 사람이 5.2%에 불과하다. 노인복지관 이용률이 9.6%로 낮다. 경로당 이용률은 26.5%로 상대적으로 높지만, 과거보다 소폭 줄었다. 다만 친목 단체 참여율은 54.2%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과거보다 증가하는 추세다.



사회적 지지 비율 OECD 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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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산업 고도화를 이룬 나라에서 외로움은 공통으로 나타난다. 미국·유럽 등이 그랬고 일본이 좀 늦게 따라갔다"며 "더욱이 한국은 산업 고도화 속도가 훨씬 빨라서 관계 빈곤에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지표를 보자. 이 지표는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친척을 둔 사람의 비율'을 따진다. 아이슬란드(98.18%), 핀란드(98.06%), 이스라엘(95.28%)이 1~3위이다. 한국은 80.47%로 38개국 중 꼴찌이다. 노인은 훨씬 나쁘다. 아이슬란드가 1위로 97.93%지만 한국은 68.59%로 뚝 떨어지는 꼴찌이다.



영국 커튼 닫혔는지 위성 확인



관계 빈곤이 심해지면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알코올에 탐닉하거나 극단적인 종교에 빠지거나 고독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영국은 고독과 같은 마음의 병을 사회적 이슈로 보고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를 만들었다. 당시 보고서에서 "외로움은 심혈관질환·우울증세를 야기하고, 인지 능력을 떨어뜨리고 치매와 관련이 있으며, 사망 위험을 높인다"고 진단했다. 영국은 500여개 라디오 프로그램을 1분간 중단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주변 친구에게 손을 내밀자"고 독려한다. 커튼이 항상 닫혀 있는 집을 위성으로 확인해서 자원봉사자를 연결한다.



"커피 한잔 하고 가"



누군가 도와주면 관계 빈곤에서 벗어난다. 기자는 지난 7월 서울 노원구의 치매환자 L(93) 할머니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막다른 골목의 빛이 잘 들지 않는 작은 집이었다.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기관인 파티마재가복지센터장현재 원장과 함께 방문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불을 켜지 않은 채 컴컴한 방에 누워있었고 "안 돼"라는 말을 반복했다. 온갖 가재도구가 널브러져 있었고 좋지 않은 냄새가 진동했다. 그 무렵부터 요양보호사가 주 5일 방문했고, 장 원장도 월 1~2회 진료하고 약을 처방했다. 그렇게 서너 달 지나자 할머니가 달라졌다. "커피 한잔하고 가." 장 원장은 최근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서 놀랐다고 한다.

최진영 교수는 "지역 도서관을 활성화해 교양 강좌, 공예 교실, 그림 그리기 등의 프로그램을 같이하면 좋다"며 "관계 빈곤 탈출 능력이 떨어져 있는 사람은 밖으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힘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가족이든 누구든 최소한 1명은 있어야 한다"며 "노년기에는 종교 활동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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