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자대학교의 남녀공학 전환 추진 논의가 알려진 11월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캠퍼스에 항의의 의미로 벗어둔 학과잠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여대의 소명이 다 하지 않았다.” (성신여대 학생들 시위 문구), “우리는 평등이 비로소 이루어졌을 때 소멸하리라.”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학생회)
동덕여대 학생들이 학교의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우려하며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수업 거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0년과 2018년 공학 전환을 검토하다 학생 반발에 부닥친 바 있는 성신여대에서도 내년부터 국제학부에 외국인 남학생 입학을 허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총학생회가 일방적 결정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학령인구 감소 등 위기대응책으로 거론되고 있는 여대의 공학 전환 논의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여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교육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성찰하자고 제안했다.
‘여대의 진화’는 여성 인권 역사
국내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화여대 전신)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공간에서 교육받을 수 없던 시절인 1886년 설립됐다. 당시 이 학교를 찾은 이들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부양하기 힘든 딸을 데리고 온 엄마,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어진 어린 소녀 등이었다. 여대 탄생 배경에는 열악한 여성 인권 환경이 존재한 것이다. 1948년 제헌헌법에 성평등을 명시하고 1950년 초등교육이 의무화되면서야 여성의 교육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됐다.
여대의 정체성 변화는 여성 인권 상황과 긴밀히 연동돼 왔다. 전통적 성역할에 부합하는 교양·직업 교육에 치중한 시기를 거쳐 ‘남자 못지않게 뛰어난’ 여성 리더십 및 직업 교육이 강화됐다. 1960~1980년대엔 여성노동자 양성이 필요했던 정부·기업 이해관계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가 맞물리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수요도 늘었다.
한때 26곳에 달했던 여대는 1990년대를 거치며 대폭 줄어든다. 정부가 1987년 졸업정원제를 폐지하고 1995년 대학 설립 기준을 완화하면서 대학 간 경쟁이 치열해진 결과다. 권김현영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기획연구위원은 “1990년대 (신입생 유치에 불리한) 수도권 바깥 지역의 여대가 공학 전환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을 거쳐 생존한 여대들의 공학 전환 고민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의미다.
동덕여대 쪽은 남녀공학 전환 추진에 대해 “대학 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며 확정된 사안은 아니라고 했으나, 교육계에서는 입학생 모집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손쉬운 대책으로 ‘공학 전환’ 카드를 검토했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현재 광주·덕성·동덕·서울·성신·이화·숙명여대 등 4년제 7곳, 한양·배화·경인·숭의·수원·부산여대와 서울여자간호대 등 전문대 7곳 등 모두 14개다. 그중 12곳은 수도권에 있다.
남성 역차별…‘여대 폐지론’ 대두
2005년을 기점으로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73.6%)이 남학생(73.2%)을 앞선 만큼 여대의 역할 역시 다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다. 더 나아가 ‘남학생 입장에서는 여대의 존재가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2009년 두 남성이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여성만 입학할 수 있도록 해 교육받을 권리 등을 침해당했다며 낸 헌법소원, 2018년 또 다른 남성이 교육부가 이화여대 등 여대 4곳 약대 정원을 320명으로 정한 것은 평등권을 침해당했다고 낸 헌법소원 등은 이러한 인식을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헌재는 두 사건 모두 여대의 역사적 전통성(경험·자산), 대학 자율성 등에 중점을 두고 남성이 받는 불이익보다 공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대학가에 퍼져있는 ‘반페미니즘’ 기류는 ‘여대=페미(페미니스트)’라는 낙인으로 이어졌고,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여대를 조롱하거나 폄훼하는 표현 역시 확산됐다. 2023년에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여대 출신 이력서는 (페미니스트 가능성이 있어서) 거른다”는 대기업 소속 이용자의 글이 올라와 고용노동부가 해당 기업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기도 했다. 권김현영 이화여대 기획연구위원은 “여대에 대한 ‘불호’가 최근에 생긴 건 아니지만, 여성·페미혐오와 함께 가는 건 최근에 도드라진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동덕여대 인문대 학생회 소속 ㄱ(21)씨는 12일 한겨레에 “동덕여대에는 ‘여성과 노동’ ‘여성심리학’ 같은 여성 관련 교양 과목이 많다. 수업에서도 페미니즘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꺼내는 분위긴데, 공학에서는 이러한 교양 과목이 개설되기조차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남성들 중심으로 페미니즘이 남성 차별 도구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대학 안에서조차 페미니즘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12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자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 학생들이 학교 측의 남녀공학 전환 논의를 규탄하며 갖다 놓은 근조화환이 놓여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공학 전환’보다 고민해야 할 것은
한겨레가 접촉한 학계 여러 인사들은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 문제 등으로 여대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공학 전환이 ‘좋은 대안’이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보단 여대라는 역사적 자산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그 유산을 이어갈 것인지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는 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은아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지난 8일 한국젠더법학회 등이 주최한 ‘여성혐오와 여자대학, 그 변화의 시작’ 토론회의 토론문에서 “여자대학은 그 자체로 옳거나 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과 위치, 새로운 질문을 통해 의미가 변화해 왔으며 또 변화해 가야 한다”며 “주변인의 관점과 경험에서 새 지식을 만들어 가는 여자대학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여전히 유효하며, 어떻게 이 역할을 해갈 것인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 인권을 증진시켜 온 경험을 토대로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지식을 생산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대의 공학 전환이 교육의 질을 높인다거나 성평등에 더 기여한다는 근거도 없다. 일반적으로 남녀공학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교육하고 성평등 의식을 고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려 여대에서 공학으로 전환한 이후 신라대 상황에 대한 연구한 논문(2002년)을 보면 남학생이 소수임에도 학내 기구의 리더를 맡는 건 남학생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현재 여대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교육 기회 확대나 성차별 완화 등 공적 가치에 이바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지금 이 시대에 여대가 왜 필요한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미 있고, 특히 여대 내에서 적극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공학화를 제시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4년 서울여대, 2008년 숙명여대가 대학원 여성학 협동과정(석사과정)을 폐지한 일을 비판하며 “여대가 단순히 여학생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소수자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권김현영 기획연구위원도 “미국의 흑인대학(HBCU)이 과학·기술·공학·수학 영역에서 흑인 엔지니어·사업가 배출을 위해 애쓴다거나 방글라데시국립여자대학(AUW)이 미얀마 집단학살을 피해 탈출한 난민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나선 사례 등을 참조해 여대의 현재적 의미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고나린 기자 me@hani.co.kr
▶▶지금 가장 핫한 뉴스, 빠르게 확인하세요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