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외환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김태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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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보트(bought), 6.9!″
딜링룸의 적막을 깨는 외침이 들렸다. 20은 20만달러(약 2억8000만원), 보트는 매수, 6.9는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 1406.9원을 뜻한다. 즉, 환율 1406.9원을 기준으로 20만달러를 사들이겠다는 말이다. 곧이어 반대편에서 “던(done)이요”이라는 짧고 굵은 외침이 들렸다. 던은 계약이 체결됐음을 알리는 단어다. 당시 실시간 환율은 1407.2원. 실시간 환율보다 낮은 가격에 20만달러를 사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내에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흘 연속 원·달러 환율 시가가 1400원대를 기록한 날이었다. 외환딜러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오전 9시 서울외환시장이 열리자 매입·매도를 알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트, 솔드(sold·매도) 등 줄임말이 빠르게 여기저기 오갔다. 이날 15명의 외환딜러는 책상에 앉아 각자 앞에 놓인 8개 모니터를 주시하며 양손으로 키보드를 바쁘게 두들겼다. 모니터엔 블룸버그, 인포맥스 등 금융 거래 프로그램을 통해 통화 및 각종 원자재 가치 등이 실시간으로 표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을 앞두고 강달러 현상이 이어지면서 은행권도 대응에 나섰다. 은행들은 외화부채 급증에 대비해 외화 파생상품 거래 등으로 외화자산을 늘리는 위험회피 전략을 짜는 중이다. 차기 트럼프 정부 때 ‘1달러=1400원’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자리 잡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자 은행들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오후 3시 30분 기준)은 전날보다 6.3원 내린 1398.8원에 거래를 마쳤다. 앞서 지난 12일 원·달러 환율은 약 2년 만에 1400원대 종가를 기록했다. 이후 사흘 연속으로 1400원대 종가 마감을 지속했으며 15일 겨우 1300원대에서 거래 마감됐다. 이날 장중 환율은 1408원대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래픽=정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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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 현상 장기화에 대비해 은행들은 외화자산 관리에 돌입했다. 신한은행은 11월부터 외화 수신상품에 금리 우대를 적용하는 등 요구불예금에 예치된 고객의 외화를 정기예금으로 전환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안정적인 외화자산을 더욱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NH농협은행은 최근 외화자산 유출입 모니터링을 강화했다. 대규모 외화 인출 가능성을 염두하고 사전징조를 확인하기 위한 조치다.
은행들이 외화자산 확보에 나선 이유는 달러 강세로 발생할 손실을 상쇄하기 위함이다. 은행은 외화자산과 외화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둘의 가치를 평가하는 회계 방식이 다르다. 외화자산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고정환율이 적용되나 외화부채는 실시간 환율로 가치를 매긴다. 같은 시점에 달러를 사들이고 똑같은 값어치의 달러부채를 만들었더라도 환율이 오르면 달러부채의 가치만 커진다. 회계장부상 자산은 그대로인데 빚만 커져 손실이 나는 꼴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은행은 고환율 시기, 외화자산을 낮은 가격에 확보해 전체적인 외화자산 가치를 키운다. 선물환 거래가 대표적인 방법이다. 선물환 거래란 미래 시점에 외화를 거래하되 외화를 매입하는 자와 매도하는 자가 환율을 특정 지점으로 고정한 거래를 의미한다. 달러의 미래 가치가 상승하는 상황을 전망한다면 선물환 거래를 통해 더 낮은 가격에 달러자산을 확보할 수 있다.
은행들은 달러 강세 현상이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라 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번 고환율 현상이 과거와 달리 더 우려되는 이유는 미 대선, 지정학적 불안정, 글로벌 인플레이션(물가상승) 등이 겹쳤다는 점이다”라며 “외환시장의 심리적 상황이나 수급 상황을 고려했을 때 원화 가치가 과거처럼 회복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태호 기자(t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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