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대국민 담화 뒤 125분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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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연 | 논설위원
지난달 17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1978년 메이오 클리닉 강연을 불쑥 끄집어냈다. 10·16 재보궐 선거 다음날이었고, 여느 때처럼 ‘정부의 의료개혁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 관계자는 ‘의대 2천명 증원을 해도 의사 처우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당시 강연의 일부를 언급하며, “주택과 자동차가 많아져도 가격이 오르는 것처럼, 의사 수가 늘어난다고 가격(의료비)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하고 질 높은 서비스를 원하는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날 한 언론에서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참모진 회의에서 프리드먼의 메이오 클리닉 강연을 언급하며 의사들을 설득할 때 참고하라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왜 뜬금없이 프리드먼의 강연이 소환된 것인지 그제야 짐작이 갔다. 프리드먼은 대통령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책(‘선택할 자유’)의 저자이다.
그런데 당시 강연의 핵심 논지는 ‘의사면허 폐지’였다. 무한 경쟁으로 더 다양하고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의료소비자의 비용 부담도 줄인다는 내용이었다. 50년 전 미국 경제학자가 편 극단적 주장을,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설득하는 논리로 쓰자고 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논리로 설득이 될 리 만무하고 주장의 앞뒤도 맞지 않는다. 필수·지역 의료를 살린다고 정부 주도로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마당에, ‘정부는 그 어떤 개입도 하지 말라’는 시장 옹호론자의 강연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윤 대통령의 4대 개혁 추진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공천개입 의혹 등으로 사실상 국정수행 동력을 상실한 뒤로는 대통령의 ‘정신승리’ 도구로 전락한 모양새다. 대통령 업적으로 포장하는 데만 골몰하다 보니 개혁의 본말이 전도되고 실질적인 성과도 나오지 않는다. 역대 정부가 하지 못한 ‘4대 개혁을 추진한 대통령’이라는 한줄 기록을 남기려는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기자회견(11월7일) 전후로 줄줄이 나온 4대 개혁에 대한 언급이 대체로 그랬다. 국민의힘 공천 개입 정황이 담긴 대통령의 육성 녹음이 나오고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 요구가 커질수록, 의료·연금·노동·교육 등 4대 개혁 추진 의지가 마치 정국돌파용 수단인 양 전파됐다. 윤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사회와 역사를 바꾼 위대한 개혁 운동”이라고 치켜올린 뒤 “4대 개혁이 바로 그것”이라 했고, “역대 정부들은 실패하고 포기”했지만 자신은 “반드시 완수해 내겠다”고 강조했다.(11월5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국민적 의혹에 답하라는 요구에 긴박하게 잡힌 7일 담화에서도 “4+1 개혁(저출생 극복 포함)이 우리의 미래를 지킬 것”이라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10일 임기반환점을 돌면서 각 정부 부처들은 자화자찬성 정책 성과를 홍보하느라 바빴다.
지금 4대 개혁은 대통령 연설문에서만 빛을 발하고 있다. 8개월 넘게 의료공백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의료개혁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전히 책상머리에 앉아 ‘2천명 의대 증원’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만 개발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민사회는 재정을 쓸 의지도 여력도 없는 정부의 의료개혁이 결국 필수·지역 의료 강화라는 본래 목적 대신 의료 영리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한다.
다른 개혁 과제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정부 단일안을 국회에 낸 것 자체를 연금개혁의 성과로 꼽는다. 하지만 지난해 진즉 내놓았어야 할 정부안이 지난 9월에야 나온 것 아닌가. 노동개혁의 본질과 거리가 먼 회계공시는 노조 자율성 침해 논란에도 개혁의 성과로 둔갑했다. “교육개혁이 본궤도에 올랐다”(대통령 담화)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일관되게 ‘개혁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에 굴하지 않고 뚝심있게 밀어붙인다’는 점을 부각시키지만, 정작 갈등 조정이나 사회적 합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기력한 모습이다.
보수 원로들 사이에서도 ‘대통령이 이제 4대 개혁을 그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집권 초 개혁 동력이 있을 때도 쉽지 않은 일들인데 신뢰를 잃은 대통령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 국정 목표로 ‘양극화 타개’를 하나 더 얹었다. 이를 뒷받침할 정책이나 재원 마련 계획은 없어 ‘말로만 양극화 타개’를 외치느냐는 반발만 샀다. ‘대통령 연설문’에 갇힌 개혁을 실행에 옮기려면 허물어진 국민적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간 추진한 개혁 정책 기조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 한다. 이러다간 ‘개혁을 완수한 대통령’이 아니라 ‘개혁을 떠벌리다 만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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