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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인류를 대표하는 지혜[내가 만난 명문장/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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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그러니 우주선에 올라요, 할머니.”

―어슐러 K 르 귄, ‘세상 끝에서 춤추다’ 중 ‘우주 노파’


동아일보

김초엽 SF 작가


‘우주 노파’라는 에세이에서 어슐러 K 르 귄은 대뜸 지구에 외계인을 데려온다. 알타이르 네 번째 행성에 사는 이 우호적인 이웃들은 인류 대표로 지구인의 본질을 알려줄 지구인 한 명을 요청한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 건강한 남자 우주비행사, 과학자가 물망에 오르겠지만 르 귄은 제안한다. 지금 마트에 가서 평범한 할머니를 데려오자고. 그 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길렀고, 평생 사소하게 여겨지는 일들을 했고, 생명의 탄생을 겪었고 죽음을 직면하며 완경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니 이 여성이야말로 지구인의 본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물론 할머니는 무척 놀랄 것이고, 저 키신저 박사를 보내라며 고개 젓겠지만 르 귄은 확신한다. “그러니 우주선에 올라요, 할머니.”

르 귄은 이 글을 1970년대에 썼다. 여성들 대부분이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림을 했고 돌봄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했던 시대상도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지구인을 대표하는 자리에 중·노년의 남성들을 주로 내세운다. 돌보고 살리는 지혜는 인류를 대표할 만한 지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픽션은 가끔 더 나은 세계를 앞서 그린다. 1996년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에는 평범한 할머니 오필리아가 나온다. 오필리아는 온몸이 쑤셔 짜증을 내고 끊임없이 투덜거리지만 누군가를 돌보는 일만은 탁월해서, 원치도 않았는데 지구인을 대표하는 존재가 된다. 작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르 귄의 에세이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마 ‘우주 노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은 세계를 바라는 상상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언젠가는 그 상상이 우리의 비현실을 현실처럼 여기는 마음에 스며들어, 이 현실을 바꿀 것이다.

김초엽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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