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가 올해 4분기 전 세계에서 가장 부진한 수익률에 허덕이고 있다. 트럼프발 ‘강(强)달러’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 이탈 정도로 치부하기엔 너무 무기력한 모습이다. 우리 시장 자체의 문제점도 크다는 의미다. 상장사 실적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뻥튀기·쪼개기 상장, 기습 유상증자, 올빼미 공시와 같은 행태마저 잇따르며 투자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밸류업 프로그램,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정부의 자본시장 친화적 행보도 투자자 사이에 만연해진 패배주의 앞에선 무기력할 따름이다. 미국 증시로, 가상화폐로 뿔뿔이 흩어지는 개미를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할까. 벼랑 끝 한국 자본시장 전반의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편집자주]
“우리 솔직해집시다. 주요 기업 상당수가 소수 대주주를 위해 움직인다는 걸 모르는 투자자가 있습니까. 기업 가치 제고(밸류업) 프로그램이 한창인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들은 구태(舊態)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상현 베어링자산운용 주식총괄본부장은 이달 15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한국 주식시장을 자조와 비관으로 얼룩지게 한 주된 책임이 기업에 있다고 했다. 최 본부장은 1995년부터 서울 여의도 증권가를 누비기 시작한 30년 차 베테랑 펀드 매니저다.
최 본부장은 최근 국내 증시 약세의 배경으로 달러화 강세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 이탈과 코스피 대장주 삼성전자의 부진을 지목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비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일삼고 주주환원에도 소극적인 상장사 문화에 있다는 게 최 본부장의 분석이다. 그는 기업은 시장 참여자의 불신을 더는 외면해선 안 되고, 정부도 강력한 지도력으로 밸류업 시도가 용두사미(龍頭蛇尾)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시장에는 변동성이 항상 존재하는 만큼 지나친 비관론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주식시장도, 대장주 삼성전자도 개선 의지가 충분하다고 했다.
다음은 최 본부장과 일문일답.
최상현 베어링자산운용 주식총괄본부장. / 베어링자산운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최근 한국 증시 약세의 가장 큰 원인을 뭐라고 보나.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혔는데, 최근만 놓고 보면 외부 요인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고금리 환경이 제법 길게 유지됐다. 각국이 금리 인하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화 강세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 이탈도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2021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중국 경제가 지금도 좋지 않다.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 경제는 중국과 연결고리가 강하다. 중국 부진은 한국 경제에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북한·중동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크다.”
─달러화 강세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뒤로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올해 한국의 수출 실적이 나쁘지 않았다. 통상 수출이 회복되면 원화 강세가 나타나곤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미국 금리 수준이 여전히 높은 상태에서 트럼프가 대권을 잡은 영향으로 본다. 미 대선 기간에 트럼프는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인 중국에 최대 60%, 그 외 나라에는 10~20%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했다. 그의 관세 인상 정책이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는 시장 우려가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트럼프발(發)’ 달러 강세가 계속 이어질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트럼프는 합리적인 전망이 쉽지 않아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 윤곽이 뚜렷해질 때까지는 뭔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증시 약세의 내부 요인은 무엇인가.
“내부 요인도 외부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긴 한데, 어쨌든 굳이 따지자면 올해 하반기 들어 D램으로 대표되는 레거시 반도체 업황이 시장 기대에 못 미치는 흐름을 보인 탓이 크다. 결국 코스피 시가총액의 5분의 1가량을 책임지는 삼성전자가 부진했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삼성전자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영역에서도 고전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투자심리 붕괴는 한국 증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개인 투자자의 ‘한국 증시 패배주의’가 짙어졌다. 자조와 비관이 시장 곳곳에서 감지된다.
“동의한다. 사실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자 불신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그게 최근 들어 확 두드러졌다고 보는 게 맞다. 정부가 연초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부는 한국 주요 기업들이 밸류업 정책에 호응할 체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간 기업들은 주주환원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두고 현금성 자산을 열심히 쌓으며 달려왔다.”
조선 DB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주가만 봐서는 밸류업 정책이 잘 먹혀들지 않는 듯하다.
“기업들이 겉으로는 밸류업 정책에 공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보수적으로 움직인다.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이어야 한다. 특히 거버넌스(지배구조) 측면에서 말이다. 경영진과 이사회는 다수 주주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최선인 판단을 해줘야 한다. 국내 기업들이 그렇게 하고 있나? 여전히 주주환원에 소극적인 회사가 많다.”
─기업은 환원보다 투자가 시급한 여건이란 반론을 제기하는데.
“주주환원을 요구하면 기업은 지금은 투자에 집중할 때라고 한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투자도 미래 준비도 주주환원과 병행할 수 있다. 기업 내부에 산적한 비효율만 개선해도 가능해진다. 돈도 못 벌면서 문어발식으로 사업 확장한 사례가 얼마나 많나. 인구 줄고 상권 사라지는 내수시장에서 요식업에 진출하겠다는 황당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투자가 급하다는 핑계를 대려면 이런 비효율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밸류업 성패의 열쇠를 기업이 쥐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우리 솔직해지자. 국내 주요 기업 상당수가 다수 소액주주보다 소수 대주주를 위해 움직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들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시장이 성숙하면서 이런 기업 행태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더는 이 울부짖음을 외면해선 안 된다.
정부도 방향 설정을 명확히 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야 한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용두사미에 그치지 않도록 제도적·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당국은 어떤 정책을 발표하고 나서 할 일 다했다는 식으로 굴어선 안 된다. 코리아 밸류업 지수만 봐도 실망한 투자자가 수두룩하지 않나. 부지런히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야 시장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삼성전자가 1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금융당국이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했을 때부터 대장주 삼성전자의 밸류업 공시를 기다리는 이가 많았다는 점에선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자사주 매입 기간이 1년에 그치고, 소각 일정을 밝힌 것도 10조원이 아닌 3조원에 불과하다. 시장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는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픽=정서희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성전자가 뭘 더해야 할까.
“투자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삼성전자는 조직 혁신이 더 급해 보인다. 삼성전자에는 이 회사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기술적·인적 자산이 많다. 삼성전자 구성원이 조직을 어떻게 재정비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삼성전자를 지금이라도 팔아야 할지 좀 더 들고 가야 할지 고민하는 주주가 많다.
“이 자리에서 내가 팔아라 말아라 정해줄 순 없다. 삼성전자가 위기에 빠진 것도 맞고, 동시에 극복 능력이 있는 기업이라는 점도 맞다. 한쪽만 단정적으로 보지 말고 각자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된다. 만약 당신이 이 회사의 위기 극복 역량을 인정하고 장기간 투자할 여력과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 주가가 기회로 보일 것이다.”
─반도체를 버리고 방산·조선·바이오 등으로 넘어가는 투자자가 많더라.
“어떤 업종이 부진에 빠졌을 때 다른 업종으로 무작정 갈아타는 게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업종마다 사이클이라는 게 존재한다. 남이 움직이는 걸 보고 사이클에 뒤늦게 뛰어든다? 삼성전자 8~9층(8만~9만원대 주가에 매수)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매매 타이밍을 직접 판단할 자신이 없다면 전문가를 통한 간접투자를 택하면 된다.”
─여전히 한국 증시에서 희망을 보는지.
“물론이다. 시장에는 늘 변동성이란 게 존재한다. 2021년 초 코스피지수가 3000포인트까지 갔을 때 지금과 같은 시장 분위기를 내다본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마찬가지로 현재 암울한 상황도 지속되리란 보장이 없다. 시장의 오르내림을 균형감 있게 보면서 투자의 기본 가치에 충실했으면 한다. 한국 주식시장 아직 안 끝났다. 변할 수 있는 요소가 많고, 개선 여지도 충분하다. 모두 우리에게 달렸다.”
전준범 기자(bbeom@chosunbiz.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