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현지시각) 제29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만난 정내권(70) 외교부 초대 기후변화대사. 윤연정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선진국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후총회’ 토론의 틀을 바꿔야 해요. 선진국에 대항해 개발도상국의 동참도 얘기할 때 한국의 리더십이 생깁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29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현장에서 만난 정내권(70) 초대 외교부 기후변화대사는 한겨레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선진국과 개도국 양쪽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그 유리함을 살리지 못하고 “그저 선진국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비판이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첫 당사국총회 때부터 30년 동안 기후총회에 참여해온 정 전 대사는 한국의 전현직 정부 관계자를 통틀어 경험이 가장 많다. 카자흐스탄 환경단체연합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번엔 카자흐스탄 정부의 초청으로 이번 총회에 참석했다.
정 전 대사는 “한국은 선진국에는 의제와 논의 방향을 지적하고, 개도국에는 돈 지원 외에 각종 제도 도입 노력을 촉구할 수 있는데, (정작 한국 대표들은) 협상장에서 이런 얘기를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카자흐스탄에선 장관도 이 문제에 적극적이라 열심히 공부하는데, 한국 공무원들은 자료를 줘도 읽지 않는다”라며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제29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만난 정내권(70) 외교부 초대 기후변화대사. 윤연정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들은 국가별 모임을 만들어 협상하는데, 한국은 오이시디(OECD) 중심의 선진국 모임에도, 중국·브라질 같은 개도국 모임(G77)에도 들어있지 않다. 1996년 오이시디에 가입 뒤 개도국 모임에서 나와 스위스·멕시코 등 5개국과 ‘환경건전성그룹’(EIG)을 따로 결성했다.
무엇보다 정 전 대사는 기후변화 토론장에서 선진국의 치부인 ‘소비 문제’가 사라졌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선진국들이 생산 과정의 ‘탈탄소’만 얘기하며, 수출로 국내총생산(GDP)을 키울 수밖에 없는 개도국에만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지디피를 줄이겠다는 나라가 과연 있겠습니까? 소비가 개선돼야 생산도 개선할 수 있는데, 유엔 논의에선 이 문제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선진국들이 탄소 배출을 줄였다 말하지만, “직접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 등으로 탄소 배출을 ‘이전’한 것”이라고도 비판했다. 예컨대 “영국이 수입한 상품에 들어 있는 탄소가 자국 내에서 내뿜는 것보다 많아요. 그런데 그걸(국가 배출량) 자기네들이 다 줄였다고 하잖아요. 줄인 게 아니라 ‘리로케이션’(이전)시킨 거죠.”
18일(현지시각)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열리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올림픽경기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에이피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특히 ‘미국이 문제’라고 콕 집어 지적했다. “1992년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남겼어요. 가장 싸구려 휘발유를 태우고 큰 차를 몰고 다니는 자신들의 소비 문화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라는 건 불가능한 얘기죠.” 그러면서 공급망에서 탈탄소를 안 하려 한다고 개도국에게 ‘기후악당’, ‘석유 국가’라 비난하는 것은 선진국들의 ‘틀 짓기’(프레이밍)라는 것이다.
소비를 바꾸기 위한 수단으론 ‘탄소세 도입’과 ‘국가가 아닌 개인 차원의 온실가스 감축’을 강조했다. 정 전 대사는 “제품의 탈탄소화를 위한 생산 과정에 그만큼 비용이 들어가는데, 가격을 그대로 둔 채 무탄소 제품을 만들라고 해선 안 된다. (탄소세 도입 등으로) 구매자가 더 높은 가격을 내도록 해야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말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할 때도 기존의 국가 목표(NDC·국가결정기여)를 정하는 방식에서 한 발 들어가 “개인이 직접 배출 저감에 참여하는 개인결정기여(PDC)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탄소중립이 되려면 결국 개인의 생활습관이 바뀌고 소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지금처럼 계속 생산 책임을 계속 개도국으로 이전하는 식이 될 것”이라 말했다.
이를 위해선 “탄소가 없는 제품과 소비를 위해 비용을 기꺼이 지출하겠다는 ‘미 퍼스트’(나 먼저)가 필요”하다. 정 전 대사는 “환경운동은 고발하고 지적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은 내가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자세”라며, “기후변화를 진정으로 막아내려면 환경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대사는 현재의 유엔 기후변화협약 자체에 대해서도 일침을 날렸다. 법적 구속력이 없어 각 나라들이 “죽기살기로 싸울 일이 없고, 대신 ‘뭐 하는 척’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미 1992년에 ‘2000년까지 1990년 수준으로 탄소 배출을 동결하겠다’ 했었고, 미국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들이 다 비준했죠. 그런데 아무도 지키지 않았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인데도요. 그런데 지금의 파리협정은 법적 구속력조차 없죠. ‘그냥 미안하게 됐다, 다음에 다시 해보겠다’로 되는 거죠. 이젠 ‘풀뿌리 방식’(bottom up) 방식으로 시민들과 사회단체가 자기들이 ‘비용을 지출하겠다’ 해서 사회적인 물결을 만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봅니다.”
바쿠/글·사진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