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서울 성북동 갤러리 반디트라소 전시장에서 만난 박진흥 작가. 그는 “자신이 접하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허공과 나무 그림자의 구도로 담아낸 것”이라고 출품작들을 소개하면서 “나의 일기장 같은 그림들”이라고 했다. 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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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경 선생이 저의 예술고 스승이었어요. 요즘 세계 미술판에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바로 그분인데, 대단히 엄격하셨어요. 회초리 맞으면서 배웠습니다. ‘네가 못하면 할아버지 박수근 선생에게 누가 된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서 어떻게 네 할아버지 볼 면목이 있겠느냐’고 말하곤 하셨지요. 딴 학생들보다 훨씬 강도 높게 훈육하셔서 솔직히 무서워했었지요.”
나목과 서민들의 풍경으로 잘 알려진 ‘국민 화가’ 박수근(1914~1965)의 손자인 박진흥(52) 작가는 원로 작가 성능경(80)씨와의 인연을 웃으며 회상했다. 지난 9일 서울 성북동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광기 光記: 드리워지다’의 개막 행사 현장에서 만나 들려준 이야기였다.
전시장엔 몇그루의 나무와 그림자가 등장하는 단순한 구도의 연작 그림과 손 없이 길쭉한 몸과 다리만을 지닌 인물군상이 낙엽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설치작품 신작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무와 그림자가 그려진 연작 그림의 화폭 속에는 작가의 빛의 파장 잔재라고 명명한 자잘한 색점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찍혀있기도 했다. 한눈에 소박하고 편안한 감성이 와닿는 전시장을 거닐면서 작가는 할아버지 박수근의 예혼이 아버지 박성남(77) 작가를 거쳐 자신에게 닿은 내력과 스승 성능경 작가가 학창시절 미친 영향 등을 이야기했다.
박진흥 작가의 근작전 전시장. 나무와 그림자가 등장하는 연작 그림들과 손 없이 길쭉한 몸과 다리만을 지닌 인물군상이 낙엽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설치작품 신작들을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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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작업들은 지평선 위에 나무가 한그루 혹은 서너그루 서있고 여기에 한개 혹은 여러개의 그림자 면을 드리운 모습들이 비슷하면서도 제각기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배치됩니다. 그림자의 면이 하나가 있는 작품은 그림을 착상한 그날 하루 삶 속에 포착된 저의 내면과 일상을 본 느낌이고요, 한 화폭 안에 각기 다른 색 그림자의 색면이 여러개 있는 건 여러날 각기 다른 인상으로 봤던 일상 풍경과 내면을 담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들이 한폭의 화폭 속에 들어있는 것이죠. 그림자만 있는 작품들도 있는데, 그건 그림자를 보는 관객 사이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나무가 있다고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풍경이라기보다 하루하루의 시공간적 단면들이 각기 다른 감성과 색채를 입고 들어간 그림이라는 설명이었다. 작가는 “나에겐 허공과 숲 등에 비치는 빛의 풍경보다 나무 같은 사물 뒤에 숙명적으로 생기는 그림자가 훨씬 편안하게 쉼을 연상시키는 의미로 다가와 계속 작업하게 됐다”면서 하루의 일기장 같은 작업들이라고 자신의 작업들을 소개했다.
부친인 박성남씨에 이어 3대째 화업을 지속 중인 작가는 국내 화단에 잘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프로 작가의 탄탄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인도의 우드스톡 국제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인도 델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웨스턴 시드니 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그뒤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한국을 오가며 10여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한 그는 풍경과 일상의 체험 등을 바탕으로 존재의 빛과 어둠, 풍경에서 끌어올리는 쉼과 명상 등을 화폭에 형상화해왔다.
할아버지 화풍의 단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화강암질의 화폭 질감을 색감만 달리해 유려하게 구사하면서 작품 속 배경의 바탕으로 쓰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박 작가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사람과 자연의 풍경을 자신의 시선으로 펼쳐냈던 조부의 예술정신을 나만의 회화 언어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잇고 싶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3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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