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를 10년 만에 다시 읽고는 기진한 상태가 됐다. 한강 작가가 참조했다는 증언집들을 정독하고 관련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혹독하게 아파야 했다. 얼마간, 다른 책을 골라야 했다고 후회했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 남은 모든 여리고 연한 것들을 집요하게 헤집어 놓는 참혹을, 그리고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여 순간의 기쁨에서마저 등 돌리게 하던 시간을.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니 완전히 참담해져서, 나는 책에서 만난 영혼들을 죄다 그림자로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어둑어둑 무거워졌다.
특별히 더욱 잔인하게 굴었던 사람들. 여성의 가슴을 난자하고 화염방사기로 얼굴을 태우거나 농인을 죽도록 때리고 폭도일 리가 없는 어린아이를 탱크에 매달아 놓은 군인들. 발포를 명령했을 이와 시민군을 진압하고서 환하게 웃는 사령관. 그들을 이해하는 일은 일찍이 포기했다. 도리어 내내 의아하여 곱씹게 되었던 마음은 따로 있다. 수백의 증언들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익명의 누군가가 달려온다. 달려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거나 피 흐르는 환부를 수건으로 감싸주거나 정신을 잃은 사람을 업어 병원으로 옮겨준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헌혈하기 위해 거리에 나와 줄을 선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무고한 시민이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피 흘리는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달려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라면 두려워서 숨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면 인간은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는 통념과 다르게 혹은 그와 비슷하게, 인간은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엔 제 안에 웅크려 있던 정의감을 발견하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극한의 상황에서 발현되는 궁극의 선이 있는 것일까. 방금 내린 눈처럼, 처음 솟은 아이의 아랫니처럼, 아무도 손대지 않아 설레는 도화지처럼 희고 깨끗한, 그래서 그런 것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빈틈없이 황홀해지는 마음들이 서로의 결백을 알아보고 맞닿기도 하면서 더욱 부풀었을까. 그리하여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소년이 온다>, 114쪽)을 이루어 거리에서 맥박 쳤을까.
산발적이나마 사라지지 않는 미광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몸을 적셔 온 무력감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었다. 소설 쓰기를 포기하려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에 붙들려 도청을 지켰던 청년의 일기를 읽고 난 후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는 한강 작가의 말을 생각한다. 특정 상황에서는 더욱 맹렬히 잔혹해지던 이들을 보며 내뱉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이 탄식으로만 남지 않도록 이를 다시 환하게 물들이는 특별히 선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기억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성현아 문학평론가 |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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