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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술이 없다면, 가수 로제가 한국의 술 게임에 착안해 만든 곡 ‘아파트’가 세계를 휩쓸지 못했을 것이다. 술이 없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전통시장을 방문해 멍게를 보고 “소주만 한 병 딱 있으면 되겠네”라며 입맛을 다시진 못했을 것이다. 왜 인간은 술을 마실까? 에탄올은 어떤 마법을 부려서 우리와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걸까?
니코틴, 카페인, 코카인, 모르핀처럼 우리의 신경계를 어지럽히는 중독성 약물은 대개 식물이 자신을 먹으려는 세균, 곰팡이, 초식동물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낸 독소다. 메탄올처럼 몇몇 종류의 알코올도 이처럼 식물이 만든 독소다. 당연히 메탄올을 우리가 함부로 섭취하면 큰일 난다. 반면에 오늘의 주인공인 에탄올은 식물이 아니라 효모가 만든 독소다.
왜 효모는 에탄올이라는 독소를 만들까? 효모와 세균은 과일, 꽃꿀, 수액에 담뿍 들어 있는 당을 놓고 살벌하게 경쟁하는 사이다. 효모는 세균으로부터 음식 창고를 지키기 위해 당을 분해할 때 나오는 에탄올로 세균을 죽인다. 과일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그 안의 에탄올 농도가 높아진다. 그러므로 에탄올을 유난히 잘 분해하도록 특별히 진화한 동물이 아니라면, 너무 지나치게 익은 과일은 과식 동물에게 일반적으로 기피의 대상이 된다.
이쯤에서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의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떠올리는 분도 있을 터이다. 인간은 적어도 2400만년 전부터 과일을 주식으로 삼았던 유인원의 한 갈래이다. 긴팔원숭이,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인간 등이 다 포함된다. 적당히 잘 익은 과일에는 약 0.6%라는 낮은 농도의 에탄올이 들어 있다(에탄올이 1% 미만인 맥주는 무알코올 맥주로 분류된다). 에탄올은 빽빽한 숲을 누볐던 유인원 조상에게 잘 익은 과일이 여기 있음을 알리는 단서이자, 그 자체가 높은 에너지원이었다. 즉, 유인원 조상은 잘 익은 과일을 찾아 먹다 보니 미량의 에탄올도 자연스럽게 섭취했다. 더들리를 따르면, 높은 도수의 술을 종종 취할 정도로 마시는 행위는 진화적 적응이 아니다. 잘 익은 과일을 먹기 위해 미량의 에탄올에 이끌렸던 과거의 적응이 폭탄주가 넘쳐나는 현대 환경에서 뜻하지 않게 파생시킨 부산물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술 한 잔에 웃고 우는 우리네 인생사를 “과식 동물 때의 습성이 아직도 남아서 그래요”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20여년 전 더들리의 가설이 나온 이래, 새로운 발견이 쏟아졌다. 2015년에 분자진화학자 매슈 캐리건이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 낸 논문은 기념비적이다. 그는 약 1000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 침팬지, 고릴라의 공통 조상이 에탄올을 당으로 번개같이 분해하는 두 개의 탈수소효소를 유일하게 진화시킨 동물임을 입증했다. 지나치게 익은 과일에는 에탄올이 약 4% 들어 있다. 맥주의 도수와 같다! 우리 인간은 이처럼 너무 익어서 에탄올이 많이 든 과일을 오히려 더 선호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왜 과일을 먹었던 많은 영장류 종 가운데 오직 아프리카 유인원(인간, 침팬지, 고릴라)에게서만 에탄올을 척척 분해하는 능력이 진화했을까? 1000만년 전에 엄청난 기후 변동이 닥쳤다.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면서, 아프리카의 열대 우림이 급속하게 쪼그라들었다. 영장류들 사이에 과일나무를 둘러싼 경쟁이 훨씬 더 심해졌다. 원숭이들에서는 아직 익지 않은 과일 속의 독소를 해독해주는 효소가 진화했다. 덕분에 이들은 설익은 과일도 따 먹을 수 있었다. 설익은 과일을 못 먹는 유인원 종의 90%는 비참하게 멸종했다.
10%의 유인원은 땅에 떨어진 과일로 시선을 돌렸다. 땅에 떨어진 과일은 가지에 붙어 있는 과일보다 대개 더 오래되었고, 효모 포자에 의해 발효될 가능성도 더 높다. 독한 에탄올을 기막히게 분해하는 능력만 운 좋게 진화한다면, 나무 위가 아니라 평지를 주로 걸어 다니며 땅에 떨어진 후숙 과일에 집중하는 전략도 꽤 쏠쏠하다. 바로 아프리카 유인원 말이다. 예컨대, 야생 침팬지는 도수가 3.1~6.9도에 달하는 야자나무 수액을 나뭇잎으로 적셔서 마신다는 게 알려져 있다.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은 큰 틀에서 옳지만, 바로잡을 점도 있다. 다른 과식 동물과 달리, 인간을 포함한 아프리카 유인원에서는 상당한 농도의 에탄올을 오히려 즐기는 생리적 적응이 진화하였다. 물론 이는 알코올 중독을 변호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설명은 정당화가 아니다. 진화적 분석은 음주에 따르는 비용과 이득을 정확히 파악해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는 것을 돕는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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