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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체중 20kg 빠진 美선교사, 고향 가란 말에 "조선보다 천국 가깝겠나" [백성호의 현문우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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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종교전문기자




140년 전, 서구 사회에 조선은 낯선 나라였다. “호랑이가 종종 출몰하고, 말라리아가 성행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다”는 뜬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멀고도 험한 나라. 그런 조선을 향해 성큼 배를 탄 미국인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당시 조선을 찾은 초기 선교사들이다.

1885년 4월 5일. 마침 부활절이었다.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한 이들은 일본을 거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누가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이들은, 결국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내렸다. 이들이 조선 땅에 첫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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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가 공부했던 미국 뉴저지 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에는 언더우드홀이 마련돼 있다. 소강석 목사(왼쪽)와 브런스윅 신학교 석좌교수인 김진홍 목사가 '신학생 언더우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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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었을까. 미국에서 쟁쟁한 명문 신학대를 졸업한 이들은 왜 태평양을 건넜을까. 풍토병이 만연하고, 현대식 의료 시스템이 전혀 없는, 다시 말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나라를 이들은 왜 찾았을까. 한국 개신교 140년을 맞아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미국 동부를 찾았다. 초기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와 출석하던 교회, 젊음을 보낸 신학교 등을 탐방했다. 한교총 전 대표회장인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도 함께했다.

#언더우드가 공부하던 신학교





미국 뉴저지에 있는 그로브 개혁교회를 찾았다. 영국에서 이민 온 언더우드 가족이 다녔던 네덜란드개혁교회다. 교회 지하에는 180년 전에 쓰던 작은 예배당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린 언더우드가 예배를 보던 공간이다. 언더우드가 5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언더우드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꼭 선교사를 시켜라”는 유언을 남겼다. 원래부터 신앙심이 강한 집안이었다.

그로브 개혁교회 뒤뜰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가족묘가 있었다. 그에게는 한국이 더 큰 고향이었을까. 유족의 뜻에 따라 유해는 1999년 서울 양화진 선교사묘역으로 옮겨졌다. 그로브 개혁교회 묘지에는 비석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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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그로브 개혁교회 뒤뜰에 있는 언더우드 가족묘. 유해는 1999년 한국으로 옮겼고, 지금은 비석과 묘지만 있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왼쪽)와 뉴욕 맨하탄신우회 김용복 목사가 언더우드 묘를 찾았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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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언을 좇아 형제들은 일해서 모은 돈으로 언더우드를 대학에 보냈다. 뉴욕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는 뉴저지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들어갔다. 북미 최초의 신학교다. 149년 전에 설립된 도서관에는 신학생 시절 언더우드가 썼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서관 한 쪽에 따로 언더우드 홀도 마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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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최초의 신학교인 뉴브런즈윅 신학교의 도서관(위). 149년 전에 지어진 이 도서관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신학생 시절 사용한 책상과 의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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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런즈윅 신학대 맥크리어리 총장은 “지금은 프린스턴 신학교가 더 유명하지만, 언더우드 당시에는 이 학교의 영향력이 더 컸다”며 “신학생 언더우드는 항상 젊고, 에너지가 넘쳤고, 교수들에게 종종 어려운 질문을 한 거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아펜젤러가 생각한 천국의 길





뉴저지의 드류신학교로 갔다. 아펜젤러가 다녔던 감리교 계열의 명문 신학교다. 역사고문서실로 갔다. 두꺼운 입학 명부가 있었다. 1882년 아펜젤러가 입학할 때 썼던 기록과 사인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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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가 다녔더 미국 뉴저지의 드류신학교. 아펜젤러의 흉상 앞에서 소강석 목사와 아펜젤러의 증손녀 쉴라 플랫 여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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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헌신적이었다. 조선 땅을 밟은 뒤 5년쯤 지났을 때 그의 몸무게는 80㎏에서 60㎏으로 줄어 있었다. 건강 상태가 안 좋았다. 1900년에 아펜젤러가 안식년을 얻자 드류신학교 동문이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함께 목회를 하자.” 그때 아펜젤러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에서 천국 가는 게, 조선에서 천국 가는 것보다 더 가깝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펜실베이니아 수더튼의 아펜젤러 생가와 고향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 근처에 묘지가 있었다. 그곳에 아펜젤러의 빈 무덤도 있었다. 1902년 6월이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가하고자 아펜젤러는 제물포에서 배를 탔다. 군산 앞바다에서 그만 다른 배와 충돌하고 말았다. 당시 같은 배에 탄 정신 여학교 여학생이 바다에 빠졌다. 이를 본 아펜젤러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결국 실종됐고, 유해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의 고향에도,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도 아펜젤러의 무덤은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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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신학교 역사고문서실에는 아펜젤러의 신학교 입학 명부가 있다. 왼쪽에 아펜젤러의 이름이 보인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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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의 증손녀 쉴라 플랫 여사가 가족 사진을 가리키며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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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펜젤러의 이 한 마디가 그의 삶을 서술하고 있을까. “크게 되고자 하거든, 마땅히 남을 섬겨라.(欲爲大子 當爲人役)” 아펜젤러가 세운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교훈이기도 하다.

#전킨 선교사 등 7인의 선발대





1861~65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졌다. 미국 땅은 남과 북으로 갈렸고, 교회 역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공업 사회인 북부와 달리 농업 사회인 남부는 노예제를 옹호했다. 남부의 교회들 역시 이런저런 성경적 근거를 들어가며 노예제를 지지했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아펜젤러는 북감리교다. 다들 북부 출신이다. 선교 지역은 한양과 수도권을 주로 맡았다. 왕실과 상류층을 선교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인지 선교 방식이 이지적이고 엘리트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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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장로교신학교. 남장로교 소속의 초기 선교사들의 사료가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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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땅을 찾은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른바 ‘7인의 선발대’다. 전킨 부부ㆍ레이놀즈 부부ㆍ테이트 남매ㆍ리니 데이비스 등이다. 이들의 선교 방식과 정서는 북부와 달랐다. 사회 지도층이 아니라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선교 지역도 한양이 아닌 호남과 충청이었다.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교회를 짓고,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웠다.

소강석 목사는 “이들의 선교는 무척 헌신적이었다. 특히 전킨 선교사는 풍토병으로 어린 아들 셋을 조선 땅에서 잃었고, 자신도 결국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전킨과 레이놀즈 등 7인의 선발대는 척박한 땅에서 호남 선교의 문을 처음 열어젖힌 이들이다. 그들의 무기는 박애와 열정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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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과 레이놀즈 선교사 등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당시에 썼던 성경과 글들이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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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유니언 장로교신학교에는 남장로교 소속의 초기 선교사들이 당시에 썼던 성경책과 편지 등 선교 사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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