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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세상사는 이야기] 아픈 이들을 위한 완곡한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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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주 연인이 아파 같이 응급실에 갔다.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음식을 먹고 탈이 났는데, 동네 병원에서 위장이 아닌 다른 쪽 문제 같다는 소견이었다. 복부 초음파 검사 뒤에 당장 응급실에 가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서둘러 종합병원을 찾았다.

몇 겹의 유리문을 통과해 응급실 침대에 눕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대기실에는 콧속에 호스를 삽입한 노인과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마른기침을 내뱉는 아이가 있었다. 연인도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순서를 기다렸다. 겨우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서도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을 꽂는 게 쉽지 않아 지켜보는 나도 애를 태웠다.

"나중에 응급실 묘사할 때 써."

아픈 와중에도 연인이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내심 그곳의 광경을 유심히 봐두었다. 응급실에는 응급실만의 질서가 있는 듯했다. 신음하며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과 다급히 오가는 이동 침대, 커튼 너머로 들리는 낮은 기도 소리까지. 조금만 걸어 나가면 환한 편의점과 빵집이 있었지만, 그런 일상의 평화가 멀게 느껴졌다. 나는 침대 옆 접의자에 앉아 얼마 전 내가 소설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라는 문장을 썼는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싶어 한동안 망상에 빠졌다. 연인을 입원시킨 뒤에 홀로 낙엽이 굴러가는 길을 걸을 땐 문득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고 싶었다.

'여러분, 부디 건강을 돌보세요! 그게 무엇이든 힘들면 때려치우고 버거우면 훌훌 내려놓으세요!'

연인이 입원한 다인실 병동에는 저마다 고유한 아픔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둔 사람과 두 다리가 온통 보랏빛으로 퉁퉁 부은 환자, 꼬박 한나절 동안 기차와 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사람까지. 연인은 통증 속에서도 농담을 주고받고, 걷기 불편한 사람을 위해 물건을 옮겨주는 소소한 배려가 어느 때보다 위안이 된다고 했다. 나 역시 복도에 서서 실손보험 처리를 묻는 어느 보호자의 씩씩한 목소리가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만만찮은 병원비가 공단 지원금 덕분에 크게 줄어드는 것도 다행이었다. 한시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의료 행위에 더해 감정노동까지 감당해야 하는 간호사들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의사한테 연락받았어. 큰 병원 갔느냐고."

연인은 처음 이상 증세를 발견했던 동네 병원에서 경과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퇴원하면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찾아가야겠다며 훗날을 기약했다. 금식하느라 식사 시간엔 괜스레 링거대를 끌고 복도를 배회했던 연인은 가까스로 유동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조차 몇 숟가락 뜨지 못했는데, 남기면 아까우니 너라도 대신 먹으라는 말에 나는 또 물색없이 수저를 들고 복통에 시달리는 환자 옆에서 짭짭 쩝쩝 밥을 먹었다. 평소 심심한 간을 좋아하던 우리는 의외로 병원 밥이 입맛에 맞는다는 산 경험을 얻었다.

우리는 집에서 가져간 익숙한 베개에 각자 머리를 대고 누워 통증과 불안을 잊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서로가 짐작하는 발병 원인과 앞으로 있을 수술, 전신마취를 하는 두려움과 앞으로 지키고픈 다짐들까지. 우리는 삶을 더 간결하고 소박하게 꾸려가자고 다짐했다. 보통의 일상을 더 기쁘고 자세하게 만끽하자고. 아픔이 우리를 주저앉히며 찬찬히 보여주려 하는 삶의 풍경을 바라보기로 했다. 고약하긴 하지만,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험한 언덕을 넘고 나면 어떤 굽잇길이든 의연하고 담담해지듯이 앓는 동안 우리는 이 곤경 속에서 새로운 눈이 뜨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디선가 신음하며 뒤척이고 있을 아픈 이들이 모두 쾌차해 다시금 안녕하고 평탄하기를 소원했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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