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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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울프 책 보며 현실 마주할 용기
먹고 사는 일만큼 읽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 진은영 시인은 최근의 서평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의 서문에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나 역시 살기 위해 읽는다. 영화감독이나 작가, 정치인처럼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읽기에 대한 실용적 필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읽고 사는 일은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하다.
복잡다단함과 지독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선악과 호오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방침이 필요하다. 이런 세계관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각자의 경험이나 생각을 재료 삼아 애써 세워둔 세계관은 덮쳐오는 현실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자주 무너지곤 한다. 무너진 모래성 같은 세계관을 도저히 다시 쌓을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나는 책을 펼쳐 도움의 손길을 구한다. 그러면 그 안에서 나와 비슷한 좌절을 겪은, 그러나 지지 않고 단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주어 마침내 현실의 무게도 시간의 풍파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의 관점을 성취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그를 만나 마침내 다시 나의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을 때까지 나는 읽고 또 읽는다. (물론 가끔 실패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렇게 믿고 읽는 작가의 목록에 82년생 영국 작가(1882년생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있다.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터를 잡고 개성 있는 책을 꾸준히 만드는 출판사 ‘온다프레스’가 2021년에 펴낸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선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에는 말의 효용성에 대한 울프의 1937년 비비시(BBC) 강의록인 ‘글솜씨’가 수록돼 있다. 여기서 울프는 말과 글을 솜씨 있게 다루는 법이 아니라 말이 가진 한계와 특징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선 말은 깔끔한 정보전달의 도구로서 실용성이 떨어진다. 말이 가진 자유로운 연상의 힘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뉴스 기사에 ‘윤석열’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특정인을 지칭하기 위한 고유명사로 인식되지만 거의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는 ‘윤석열’이라는 3음절 단어에 결부된 온갖 기억과 연상과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수천 가지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 말의 본성”이므로 하나의 단어가 그 어떤 오해의 여지 없이 하나의 뜻과 결합하는 식의 깔끔한 실용성을 말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말이 가진 진짜 장점은 ‘진실을 말하는 힘’이다. 건물도 집도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지만 적절히 쓰이기만 한다면 “말은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오래도록 시간의 변천을 견뎌내기에” 말이야말로 가장 진실하다는 주장이다. 이 흥미로운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을 적절하게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울프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받는 대신 완곡하게 암시한다. 말은 사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 속에 산다고, 그리고 말은 사람들에게 말 그 자체보다는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기를 바란다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비결을 물었는데 중요한 것은 우선 당신의 고유한 정신으로 이 세상을 마주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무 일이나 마구 일어나는 것 같은 세상을 맨정신으로 마주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솔직히 너무 힘겹다고 느끼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투표 직후 15분 동안 15개의 거짓말을 했다는 워싱턴 포스트 인용 보도를 읽을 때, 트럼프 당선 이후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 지구에 구호품 지급을 완전히 끊는 ‘가자 굶겨죽이기’ 작전을 공식화했을 때, 명태균 녹취록 공개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사과를 해놓고도 정작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대통령의 시대에 국내 7개뿐인 여대 중 한 곳이 학생들과 아무런 상의 없이 남녀공학 전환 논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6살에 몽골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23년간을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온 강태완 님이 적법한 한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인구감소지역에 취업한 지 8개월 만에 산재로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지금 눈앞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그저 눈을 꼭 감고만 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설령 눈을 감는다 해도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 아수라장은 우리 존재의 일부다. 우리가 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장면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의 조각을 품고 있다.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세상의 모습을 직면하고 그렇게 얻은 통찰을 사람들과 나누며 우리는 지금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이 되어갈지에 대해 끈질기게 이야기해나갈 책무와 열망이 아직 우리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기에 읽고 싶다. 우리 자신의 끔찍함과 저열함과 그럼에도 놓지 않은 희망과 가능성에 관한 온갖 진실한 이야기들을 함께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 때로는 읽는 힘이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은 그런 힘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이기에.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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