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곧 끝날 모양이다. 하루가 다르게 빈 가지만을 가진 나무들이 많아지는 걸 보니. 긴 여름을 견디느라 바닥난 체력과 정서가 제대로 채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을의 끝자락이라니… 많이 아쉽다. 그때문인지 단풍 명소에 대한 기사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중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 중인 1200살 은행나무 소식이 유독 관심을 끌었다. 국가정책으로 인해 집과 마을이란 삶의 터전이 소실되지만, 적어도 마을 수호목인 이 나무만은 나라에서 보호해 달라는 청원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연이 좀 안타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버틴 나무라니, 당연히 살피고 돌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은행나무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수목이다. 흔히 나무라고 하면 성장과 생장을 거듭하며 아주 긴 시간을 살아남는 거로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무들에게도 세월은 흔적을 남긴다. 일례로 정원수로 많이 사용되는 사과나무는 보통 50년이 지나면 활력을 잃는다.
수명이 긴 걸로 알려진 소나무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소나무과에 속하는 가문비나무의 경우 300년이 지나면 노쇠의 징후가 나타난다. 인간이 고작 한 세기도 살기 어려운 거에 비하면 영겁의 시간을 견딘 거지만, 1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건강한 은행나무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힘들다.
게다가 은행나무는 단순히 오래 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600살이 넘은 후에도 번식이 가능한, 그야말로 ‘늙지 않고 오래사는 나무다. 그리고 이는 지난 2020년 미국의 종합과학 저널인 국립과학원회보( PNA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한 연구 결과에 의해서도 다시 한번 입증됐다.
나무의 나이를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이테가 있다. 나이테는 나무가 얼마나 위로 그리고 옆으로도 잘 자라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특히 후자의 경우 (BAI: Basal Area Increment)라는 수치로서 2차 성장, 즉 나뭇가지의 단면적이 얼마나 잘 증가했는지 알 수 있다.
보통의 경우 나무가 어릴 때는 나이테가 두껍고, 나이가 들수록 나이테가 얇아진다. 어린 나무는 성장이 빠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나무의 성장 속도가 느려짐을 뜻한다. 은행나무 역시 처음 100년, 200년 동안은 나이테 두께가 급격하게 감소한다. 그러다 다음 몇백 년 동안 서서히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얇은 나이테는 나무가 물, 영양분 등을 적게 사용해 생명을 유지하는 체제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나무의 영리한 생존 전략이 담겨있다.
그렇다고 성장이 방해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연구 내용에 의하면 은행나무의 경우 2차 성장을 측정하는 BAI의 값이 10년 된 나무부터 600년 된 나무까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600살이 넘어도 젊은 나무처럼 계속 자란다. 다시 말해 은행나무는 세포 분열과 생장 활동을 꾸준히 유지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성장이 멈추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게 사실일까? 이는 관다발 형성층(vascular cambium) 분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이 세포는 나무의 성장과 물질 순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때문에 나이와 함께 변화하는 생리학적 차이를 살펴보는 데 적합한 대상이다.
연구팀이 9그루의 은행나무를 수령에 따라 어린(20살 이하), 젊은(약 200년) 그리고 늙은(600살 이상) 나무로 그룹을 나눈 후, 그룹별로 관다발 형성층 세포를 추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론에 이르렀다.
우선 은행나무의 관다발 형성층 세포는 나이가 수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활발하게 분열할 수 있다. 마치 오래된 기계라도 꾸준히 점검하고 수리해서 새것처럼 사용하는 것처럼, 은행나무는 세포 내의 DNA 복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덕에 세포를 계속 분열시켜 성장하고, 손상된 조직을 복구하며, 수백 년이 지나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은행나무는 ‘늙지 않는 세포 분열 기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노화를 유발하는 유전자의 활동 억제다.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명체는 나이가 들수록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가 더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세포가 점차 녹슬게 된다. 세포의 재생과 회복의 능력이 떨어지는 거다. 그런데 은행나무에서는 노화를 가속하는 스위치를 꺼둔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이다. 동시에 세포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유전자들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말하자면 은행나무는 ‘자연이 만든 안티에이징 전문가’라고 할 수있다.
이뿐 아니라 은행나무는 강력한 항산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산화는 세포가 나이를 먹는 과정과 비슷하다. 사람의 몸에서 세포가 산화되면 노화나 질병이 생기듯, 나무의 세포도 시간이 지나면서 손상되고 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은행나무의 세포벽은 리그닌이라는 강력한 보호막 덕분에 이런 산화 과정이 천천히 진행된다. 마치 방수 처리가 잘된 옷이 빗물에 쉽게 젖지 않듯, 은행나무의 세포벽도 시간이 지나도 쉽게 망가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리그닌은 단순히 보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성분은 세포벽을 단단하게 결합시켜 외부로부터 병균이나 해충이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 덕분에 병충해에도 강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은행나무는 자기 몸을 보호하는 방탄 조끼를 입고 있는 셈이다.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려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하지만 무거워 널리 퍼지지 못하며, 악취가 심해 동물에 의해 이동되지도 못하는 열매 때문에 인간에 의해 심겨지고 또 보호 받아야 하는 아주 신비롭고 재미난 존재다. 은행나무는!
[이난영 과학 칼럼니스트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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