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문화선임기자 |
정말이지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지난주 바나나 한 개를 은박 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4)의 설치 작품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0일 620만 달러(약 86억7000만원)에 팔렸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이 작품 제목이 ‘코미디언’입니다. 작가인 카텔란이 2019년 미국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갤러리 부스 벽에 바나나를 붙일 때부터 코미디는 시작됐습니다.
당시 벽에 붙었던 바나나가 3종의 에디션으로 각각 12만∼15만 달러(약 1억6000만∼2억1000만원)에 팔렸을 때 뉴욕 포스트 기사 제목이 “바나나! 미술계가 미쳤어요(Bananas! Art world gone mad)”였습니다. 이번에도 어이없는 가격에 팔렸으니, “아직도 미쳐 있어요!”라고 해야 할 지경입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2024, 생 바나나, 덕테이프, 가변크기.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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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부분은 낙찰자가 중국 태생의 가상화폐 ‘트론’의 창업자 저스틴 선이라고 바로 알려진 점입니다. 뉴욕타임스(NYT) 20일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그는 “가상화폐를 불법적으로 홍보한 혐의로 미국증권거래위원회가 법원에 고소한 8인 중 한 명”입니다. 그런 그가 바나나 한 개에 87억원을 기꺼이 지불하고 나섰습니다. NYT는 이에 대해 “(가상화폐 업계가) 어려운 시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 크게 움직일 것이라는 신호”라고 분석했습니다. 어쨌든 이번 경매가 87억 원짜리 가상화폐 홍보 쇼가 됐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궁금해집니다. 카텔란은 그때 무슨 생각으로 이 ‘코미디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일까요? 당시 그는 미술 시장을 풍자하기 위해 “예술 시스템에서 사물이 어떤 기반으로 가치를 획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가 테이프로 벽에 붙인 것은 바나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시를 여는 갤러리 대표를 붙인 적도 있습니다. 좀 과격하긴 했지만, 미술 시장에 대한 그 나름의 조롱이자 일침이었습니다. 특히 미술 경매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이었습니다. 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경매에서 작품이 비싼 값으로 판매돼 경매 회사와 수집가들만 혜택을 누리고, 정작 그 물건을 만든 제작자(예술가)는 소외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은 작품, 즉 바나나 한 개를 떡 하니 작품으로 내놓았는데 그게 계속 굴러가며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바나나 코미디’가 암시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침체한 현 미술품 경매 시장입니다. 최근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 등 3대 경매회사의 판매액은 지난해 11월보다는 40%, 2022년 시장 정점보다는 60% 감소한 수준입니다. NYT가 “(지금) 드라마나 바나나 없이는 경매 시장이 힘들다”고 쓴 이유입니다.
이 코미디는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5년 전 ‘코미디’를 시작한 카텔란이 지금 어떤 표정일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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