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해외 문자학자들이 많다는데...
파스파 문자(왼쪽 줄)와 한글 중 발음이 같은 글자 몇 개를 비교해 놓은 그림. /조선일보 DB |
이제 해외에 나가서 한글과 마주치는 것은 흔한 일이 됐습니다. 한국산 중고 버스의 한글로 쓰인 행선지 안내문을 일부러 떼지 않고 운행하는가 하면, 한국산이 아닌데도 한국산인 척 한글로 써 놓은 상품도 종종 봅니다. 식당 메뉴판 같은 데서 엉터리 한글을 보면 배를 잡고 웃기도 하죠. 한글이 세계화돼 가는 것을 보고 있는 우리는 한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젊은 외국인들은 ‘한글은 유독 동그라미가 많아 예쁘다’며 선호하기도 하죠. 우리가 못살던 시절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외국 학자들 중엔 한글에 대해 심드렁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계 문자학계에선 아직도 이런 편견을 가진 학자들이 상당수 있다고 합니다.
“한글? 그거 몽골의 파스파(八思巴) 문자를 모방한 것 아냐?”
파스파 문자란 1265년 티베트 출신의 파스파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만든 문자로 지금은 쓰이지 않습니다. 위 그림에서 몇 개 파스파 문자와 한글의 자형을 비교해 보면 일견 비슷한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뭐 그렇게 비슷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국내에서 드물게 깊게 연구한 학자가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한글이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문자가 다른 문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종은 고도로 발달한 인도와 중국의 음성학, 몽골의 파스파 문자까지 깊게 연구했습니다. 한글은 국제적인 언어학의 토대 위에 독창적인 형태로 더욱 발전시킨 문자였습니다. 조음 음성학의 이론에 근거해 초성 글자를 발음기관의 모양을 따 상형(象形)하는 놀라운 자형(字形)으로 만들었고, 모음의 중성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형했는데, 이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글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언어학자 정광 교수가 2023년 4월 19일 서울 중계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박상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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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정광 교수가 말한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받은 영향’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금닛소리인 아음(牙音), 혓소리인 설음(舌音), 입술소리인 순음(脣音) 같은 36개의 중국어 자모(字母·한글의 초성에 해당)를 기본틀로 해서 글자를 만든 것에서 유사점이 있다는 얘기죠.
그러나 한글의 자형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파스파 문자가 기존 티베트 문자의 형태를 조금 변형해 만든 것인 반면,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의 모습과 천지인 삼재를 표현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천지인 삼재라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편리한 것인지는 휴대전화 자판을 쓰는 21세기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세계의 소위 문자학자라는 사람들이 ‘훈민정음’의 제자해(制字解)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원리를 기록해 놓은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글자 창안과 동시에 기록한 문자는 이 세상에서 한글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기록이었을까요. 사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예전 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나왔던 얘기들이기도 합니다.
“아음 ㄱ(기역)은 혀뿌리가 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떴다.”
“치음(齒音·잇소리) ㅅ(시옷)은 치아의 모습을 본떴다.”
“후음(喉音·목구멍소리) ㅇ(이응)은 목구멍의 모습을 본떴다.”
한글 기본 자음의 제자(制字)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 /수학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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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발음이 입 안에서 어떤 신체 기관에 의해 나는지를 파악해 그 기관의 형상에서 유래된 모양의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일부 중국인 관광객 가이드들이 경복궁 같은 데서 ‘세종이 창호지 바른 문 모양을 보고 기역 니은 디귿을 만들었고 손잡이를 보고 이응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식의 근본과 개념을 상실한 헛소리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글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킥’이 있습니다.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뤄진 음절 하나를 한 글자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초성이 묵음인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바로 소리가 나지 않는 ‘ㅇ’을 여기에 넣은 절묘한 해법이었습니다.
묵음을 ㄱ도 ㄴ도 ㅅ도 아닌 동그라미로 표현하다니!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아라비아 숫자 ‘0′과도 통하는 무(無)의 개념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모든 중성자(모음)를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정 교수는 또한 파스파 문자에는 전혀 없는 종성(받침)이 존재하는 것 역시 훈민정음만의 독창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위 그림에서 보이는 듯한 파스파 문자와 한글의 유사점은 그저 우연이었던 것입니다. 한글의 ‘ㅇ(이응)’은 영문 대문자 ‘O(오)’, ‘ㅌ(티읕)’은 대문자 ‘E(이)’, 모음 ‘ㅣ(이)’는 소문자 ‘l(엘)’과 유사한데 그럼 훈민정음이 알파벳을 모방한 걸까요? 심지어 마지막 경우는 자판의 위치까지 같습니다.
과장된 국수주의나 애국심을 요즘 말로 ‘국뽕’이라고 합니다. 차오르는 국뽕의 거품을 걷어내고 또 걷어낸다 해도 마지막으로 남는 국뽕의 고갱이는 바로 한글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글 전용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원래 목적이 한자의 발음을 제대로 표기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말 단어의 7할이 한자어임을 생각하면, 한국인이 한글과 한자라는 두 칼을 양손에 든다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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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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