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석쇠불고기
서울 강남구 ‘면육당’의 한우바삭불고기.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어릴 적 부엌에는 지금 보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우선 절구였다. 어머니는 늘 마늘과 생강을 그때그때 빻아 썼다.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동생과 나는 절구를 붙잡고 마늘과 생강을 빻았다. 요즘은 보통 미리 다져 놓거나 아니면 갈려 있는 제품을 쓴다. 향과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석쇠였다. 보통 오징어나 쥐포를 끼워 가스불이나 연탄불에 구웠다. 앞뒤로 뒤집어 가며 살짝 그을려 구우면 아버지는 병맥주를 따서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동생과 나는 그 석쇠를 붙잡고 쫄쫄이 같은 것을 무던히도 태워 먹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어머니는 다시 석쇠를 꺼내 고기를 구웠다. 석쇠를 달구고 기름칠을 하는 수고가 들었지만 맛이 달랐다. 그을린 끄트머리는 짭조름하고 매캐한 맛이 났다. 압력솥에서 갓 나온 밥을 곁들이면 상에서 고개를 들 틈이 없었다.
석쇠를 보기 힘든 이유는 여럿이다. 인덕션처럼 직화 자체가 불가능한 주방기구가 흔해졌다. 구태여 연기 나고 불편한 일을 하는 집도 드물어졌다. 시대가 바뀐 것인지 사람 마음이 변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긴 결혼식처럼 축하할 일에도, 혹은 슬퍼할 일에도, 찾아가 인사하기보다 자주 문자 메시지로 갈음한 것 또한 나였다.
한남IC 근처 신사동 끝자락에는 여전히 불편하고 번거로운 석쇠를 고집하는 집이 있다.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면육당’이란 이름을 새겨놓은 그 집은 반지하에서 고개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후미진 골목 언저리 불을 켜놓은 기사 식당 같기도 했고, 강원도 국도 변 어디에 문을 연 한적한 백반집 같기도 했다. 짧은 계단을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땅 아래로 흐르는 차가운 공기는 불이 이글거리는 주방의 열기가 가로막았다. 자리는 찼다. 예약을 하지 않은 이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서울 강남구 ‘면육당’의 한우바삭불고기.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문을 넣으니 지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음식이 나왔다. 석쇠째로 나온 ‘한우 바삭불고기’는 투플러스 등급을 썼다고 했다. 습관적으로 색이 거뭇한 가장자리부터 손이 갔다. 달달하고 간간한 맛이 부드러운 고기에 잔잔히 배 있었다. 고기를 얇게 저며 양념을 절인 덕에 맛에 빈 곳이 없었다. 석쇠를 쓰면 구운 맛은 좋아지지만 익히는 내내 눈을 떼서는 안 된다. 타기도 쉽고 오래 익히면 질겨지기 십상이다.
대신 스테이크같이 크고 두꺼운 고기는 오히려 대량 조리하기 유리한 면이 있지만 맛은 단순하다. 아무리 고급 기술을 써도 불에 익힌 고기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기를 저미고 양념을 만들어 절이고 다시 얇게 펴서 불 위에서 굽는 모습을 떠올리니 이 모든 맛이 켜켜이 쌓인 시간과 정성의 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빨간 양념이 되어 나온 ‘고추장 삼겹살구이’에 홍천 국도 변에서 먹던 화로구이 생각이 났다. 연기가 가득한 식당 안에서 고기를 앞뒤로 뒤집느라 시간이 갔던 강원도의 깜깜한 밤이 아니라,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자주 보이는 신사동 어귀에서 이런 맛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매콤하고 달달한 삼겹살 구이는 분석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젓가락이 먼저 나갔다.
이 집에서 직접 빚고 뽑는다는 만두와 막국수가 뒤를 이었다. 상앗빛으로 피가 반쯤 투명하게 비치는 만두는 모양을 보자마자 맛을 짐작할 수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테이블에 만두소를 가득 올려놓고 빚는다고. 직접 뽑은 면을 한 움큼 올리고 빨간 양념과 김가루를 뿌린 비빔막국수는 과일을 잔뜩 갈아 넣어 양념 맛이 단순하지 않았다. 푸릇하고 향긋한 맛이 아지랑이처럼 입안에서 뭉게뭉게 올라왔다.
사람들은 모두 배가 한껏 불러서 크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긴 영업을 끝낸 주인장이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연기를 듬뿍 쐰 주인장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그렇다고 힘겨워 보이진 않았다. 사람들은 견딜 수 있을 만큼 행복해지는 법이다. 혹은 그만큼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사실을 우리 어머니들은 알고 있었다.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면육당: 한우바삭불고기 1만9000원, 고추장삼겹살구이 1만8000원, 비빔막국수 1만2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