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최은주의 컬렉터&컬렉션]
한·일 양국에 미학 나눔
재일 교포 2세 하정웅
그는 지금도 작품을 모은다. 중요한 컬렉터라는 사실을 잘 아는 화상(畫商)들이 연락하면 여력이 닿는 한 구매한다. 그러고 나서 ‘어디에 기증할 것인가’ 궁리한다. 말하자면 그는 기증하기 위해 수집하는 사람이다. 지난해에는 그가 사는 동네 인근의 사이타마현립근대미술관에서 미술품 기증 공로로 감수포장을 받기도 했다. 며칠 전 선생과 길게 통화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 작품에는 인간이 담겨 있습니다. 10년, 100년 뒤 분명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할 겁니다.” 예전만큼 우렁차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명료한 목소리였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의 드로잉 판화 ‘파리의 기억’(1928).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하정웅은 1939년 일본 히가시오사카(東大阪), 오사카의 동쪽 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남 영암에서 빈농의 아들로 살던 그의 부친 하헌식은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모친 김윤금 역시 고아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1938년 결혼한 부부는 이듬해 하정웅을 낳았다. 하헌식은 공사장 노동자, 마부 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지만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정웅은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화가가 되고 싶었다. 일본 최고 명문고 중 하나인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 미술부를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반 고흐전(展)을 보기 위해 도쿄행 열차에 올라탈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그러나 영특했던 하정웅은 자신의 상황을 일찍이 알아차렸다. 화가가 될 수 없음을. 어머니의 반대도 극심했다. 그림 그려서는 먹고살기 힘들다며 아들의 화구(畵具)를 강물에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2012년 서울 방문 당시의 컬렉터 하정웅. /조선일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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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후 곧장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도쿄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조선인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이었다. 어렵사리 배선 기구 기술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작은 가전제품 상점을 인수해 1964년 그의 성을 딴 ‘가와모토(河本) 전기상사’를 세웠다. 도쿄올림픽 특수로 TV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훗날 부동산 사업으로 큰 부(富)를 축적하게 된다. 그는 가끔 백화점에 들러 이곳저곳 구경하며 스트레스를 풀고는 했다. 1960년대 중반, 하정웅은 우연히 재일(在日) 화가의 전시를 보게 된다. 당시만 해도 재일 작가들의 존재감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미했다. 결코 돈 되는 작품이 아니었다. “아직 한 점도 못 팔았다”는 화가의 말. 하정웅은 처음으로 그림 구매를 결정했다. 컬렉션의 시작이었다.
◇처음 산 그림이 ‘미륵보살’
재일 교포 화가 전화황의 유화 연작 ‘미륵보살’(1976).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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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림이 바로 전화황(1909~1996)의 ‘미륵보살’이다. 전화황은 평안남도 안주 출생이지만 식민지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 수행과 화업을 병행한 화가다. 전화황은 자신이 겪은 식민 시대 경험과 전쟁의 비극을 불심(佛心)으로 정화하려는 듯 ‘미륵보살’ ‘백제관음’ ‘관음만다라’ 등 고요하면서도 신비롭고 구도적인 그림을 추구했다. 살짝 고개 숙인 채 온화하게 미소 짓는 ‘미륵보살’. 하정웅은 이 그림을 본 뒤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음을 고백했다. “마치 나를 위해 혹은 온갖 상처로 고통받는 약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황의 그림에 매료된 하정웅은 오랜 기간 전화황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작품을 총 92점 수집했다. 전화황의 삶을 통해서는 인류애와 평화주의자의 태도를 공유했고, 그의 그림을 통해서는 ‘기도의 예술’이라는 정신을 받아들였다. 하정웅은 “전화황 덕분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어릴 적 품었던 화가의 꿈 대신, 감춰져 있는 명작(名作)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컬렉터의 길을 가겠노라는 소명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은 세계적 작가가 된 이우환(88)을 포함해, 그의 컬렉션은 곽인식·곽덕준·손아유·조양규 등 재일 교포 화가뿐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서양 미술사 거장의 그림까지 뻗어나간다.
◇광주에 실현한 ‘기도의 미술관’
제주도 출신 재일 교포 화가 송영옥(1917~1999)이 건장하지만 궁핍한 어촌의 부부를 담아낸 그림 ‘어사’(1958).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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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키타현에서 자랐다. 양친이 그 지역 발전소 공사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 옆에는 조선인 무연고 무덤이 여럿 있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희생이 많은 곳이었다. 하정웅은 “고향에 언젠가 내 컬렉션으로 미술관을 세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의 컬렉션에서 비중이 큰 재일 한국인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징용 및 관동대지진 등으로 희생된 재일 한국인을 위령하는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이었다. 지자체와 구체적인 협의까지 마쳤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징용공·위안부 문제 등이 부각되고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92년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다. 기증 요청이었다. 그때 하정웅은 다자와코(田澤湖) 호숫가에 ‘기도’의 마음으로 세우려 했던 미술관이 5·18을 겪은 광주에서 실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건은 달라도 인간과 역사를 위한 기도는 결국 서로 통한다는 생각. 자신의 컬렉션이 광주, 한국,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경남 함안 출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세계적 거장으로 거듭난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No.202′(1974).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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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그는 한국 국적을 택했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때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하정웅은 주저 없이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으로 임명된 날”이라고 말했다. 2000년 1월이었다. 광주시는 이듬해 11월에 그를 다시 종신 명예관장으로 위촉했고 ‘제1회 하정웅청년작초대전’도 열었다. 1993년부터 2014년까지 6차에 걸쳐 작품 2600여 점을 기증한 하정웅의 ‘기도의 미술관’은 청년 세대까지 아우르며 실현됐다. 2007년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영암에 작품 709점을 기증하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전남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컬렉션은 전북도립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포항시립미술관 등에 분포돼 있다.
◇컬렉션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
무용가 최승희를 촬영한 사진 ‘빛을 구하는 사람’(1931).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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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도중 선생이 한국의 40대 미디어 아티스트 남화연을 안다고 해서 크게 놀랐다. 그의 관심사와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 작가까지 알고 있다니. 선생이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에 기증한 근대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과 영상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이 몇 년 전 남화연에게 왔다고 했다. 그는 선뜻 그러겠노라 약속했고, 남화연은 이 협조에 힘입어 2020년 열린 개인전에서 최승희 아카이브를 활용한 입체적 전시를 구성했다. 조선과 일본,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구,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파편화된 자료로만 남아 있는 최승희라는 인물을 통해 예술가적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무거운 주제를 탐구했다. 하정웅이 재일 한국인이었기에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쉽게 수집할 수 있었던 사진 컬렉션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정웅 컬렉션’을 후대가 재해석하는 기쁨을 하정웅은 맛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 대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훗날 우리가 남기는 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닙니다. ‘무엇을 이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이뤘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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