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진술이 달라졌지…?”
올해 2월.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사건 기록을 살펴보던 울산지검 김효준 검사(36·변호사시험 5회)의 손이 느리게 멈췄다. 1심 판결이 끝나고 2심을 준비하기 위해 넘겨받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피고인 A 씨는 함께 살던 동거녀와 성관계하는 모습을 동거녀의 자녀에게 강제로 보게 한 아동학대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동거녀 김모 씨는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땐 “A 씨가 자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성관계 장면을 강제로 보게 한 것이 맞다”고 진술했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서는 “사실 검찰에서 한 말은 거짓말”이라며 기존과 180도 바뀐 증언을 했다.
26일 울산지검 김효준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며 피고인의 위증교사 혐의를 포착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미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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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 단계부터 사건에 참여한 김 검사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다시 시작됐다.
● 4년 만에 드러난 범죄 행위
먼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A 씨와 김 씨는 2016부터 2019년까지 3년간 동거를 했다. 당시 김 씨의 11살 자녀도 함께 살았다. A 씨와 김 씨가 성관계를 가지던 도중 이를 알지 못했던 아이가 방문을 열었고, A 씨는 아이가 거부하는데도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계속 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A 씨는 불법 성인 동영상을 보는 본인의 모습을 아이에게 지켜보게끔 하면서 추가적으로 정신적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
김 씨는 지적장애가 있었다. 신고 없이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은 김 씨의 자녀가 담임 교사와의 상담과정에서 이를 털어놓으면서 진상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다. 아이는 울면서 “사실 어렸을 때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너무 힘들다”며 교사에게 토로했다. 교사는 아동학대 상담 기관에 이 사실을 전달했고, 기관이 경찰에 신고하며 수사가 시작됐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던 공판 검사의 눈에는 용기를 내 신고하게 된 피해자 측의 진술이 갑자기 법정에서 뒤바뀐 상황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위증 그리고 위증교사는 보통 사건 당사자들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피해자가 위증하거나 피고인의 위증교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 피해자에 진심 어린 설득 “사실 밝히는 마지막 기회”
“저희 아이가 옛날에 거짓말한 거예요. 2019년에 A 씨와 헤어질 때 A 씨한테 쫓겨나듯 나왔거든요. 그러면서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나쁜 생각이 들어 혼내줘야겠다는 마음에 저도, 저희 아이도 당시 거짓말로 진술했습니다.”
김 씨는 검찰청에 와서도 법정에서 한 증언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럼 1심 재판 전 수사기관에서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도 김 씨는 “A 씨가 저랑 동거하면서도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다음, 추운 겨울에 저희를 쫓아내서 너무 화가 나 거짓말로 신고하기로 한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마치 짧게 암기한 내용을 반복해 말하기라도 하는 듯 같은 진술만을 되풀이한 것.
항소심 재판부터 사건에 투입된 김 검사였지만 답변 내용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A 씨의 항소이유서와 같은 내용을 녹음 테이프를 재생하듯 김 씨가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A 씨는 1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에 대해 불복해 항소를 한 상황이었다. 이때 법원에 제출한 A 씨의 항소이유서에는 김 씨의 법정 증언과 똑같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항소이유서에는 “추운 겨울에 내쫓은 저에게 앙심을 품고 동거녀와 그 자녀가 수사기관에서 거짓으로 진술하였으며…. (중략) 1심에서의 판단은 억울하고…”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김 검사는 재차 조사를 이어갔다. “혹시 A 씨가 이렇게 말하라고 그대로 시킨 건 아닌가요?”
울산지방검찰청 청사 전경.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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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입을 열지 않던 김 씨였지만 담당 검사의 설득과 지적에 차츰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위증한 것이지, 위증 교사가 있던 것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김 검사는 ‘그럼 딸은 왜 학교 상담에서 갑작스레 울며 그런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것인지’ 재차 물었다. 김 씨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던 장애인 복지기관의 상담사도 여기서는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같이 설득했다.
3시간쯤 지났을까. “이렇게 끝나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검사의 이 말에 김 씨는 그제야 A 씨로부터의 위증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날 A 씨로부터 전화가 오더라고요. (본인이) 큰 벌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부탁하니까 솔직히 불쌍한 마음도 들고…”
● 통화 기록이 말해주는 그날의 상황
김 씨의 자백 등을 토대로 이 사건은 아동학대에서 위증교사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전환됐다. 우선 검찰은 김 씨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 등을 분석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수상하리만치 몰려있는 통화내역을 발견했다.김 씨의 1심 증인 재판 출석이 예정된 날부터 그 전 1주일 사이에 수상한 통화가 몰려 있는 점이었다. A 씨가 제3자에게 전화를 걸면 곧바로 제3자가 김 씨에게 전화를 거는 패턴이 반복된 것. 수사 결과 A 씨는 검찰이 위증교사를 의심할 것을 대비해 김 씨에게 연락할 때는 본인의 휴대전화가 아닌 제3자의 휴대전화를 빌려 연락한 것이었다.
또 김 씨가 법정에서 위증을 한 날에도 수상한 통화 내역이 남아있었다. 기지국 위치 등을 분석한 결과 A 씨와 김 씨가 법원 내에서 만난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후에도 서로 만나 입을 맞춘 것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검찰이 항소심을 앞두고 김 씨에게 조사 통보를 하자 ‘A 씨-제3자-김 씨’로 이어지는 통화 패턴이 다시 발견되기도 했다.
추가로 결정적인 증거도 확보됐다. 검찰이 김 씨의 노트를 확보했는데 여기에는 A 씨가 김 씨를 만나 “불러주는 대로 적으라”며 “이 내용을 그대로 외워 진술하면 된다”고 강조한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법정에서 김 씨가 위증했던 내용, A 씨가 항소이유서에 적은 바로 그 내용이었다.
● 檢, 아동에게까지 면담 강요한 혐의 포착
추가 수사가 이어지자 A 씨의 전방위적 위증교사 행위가 속속 드러났다. 1심 재판에서 김 씨가 증인으로 불려간 날, A 씨는 김 씨를 따로 만나 종이를 넘겨주며 “내가 써준 내용을 잘 암기해서 재판에 들어가라, 암기하고 잘 마치면 끝나고 고기 사주겠다”라며 지적장애가 있는 김 씨를 회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는 김 씨에게 “2심은 판사가 3명이다”, “3명이니 더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등으로 위협한 것으로 나타났다.
A 씨는 1심에서 무죄가 아닌 벌금형의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김 씨의 자녀가 ‘위증’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2심 법정에서는 꼭 아이까지 증인으로 나와 “나를 위해” 증언을 해줘야 한다고 김 씨에게 강요를 했다. 동거녀었던 김 씨뿐 아니라 자녀에게까지 면담을 강요한 사실 등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김 씨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딸에게 검찰에 가서 사실대로 다 말했다고 했더니 딸이 엄마가 진실대로 말하는 거 응원한다”며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래서 둘이 끌어안고 막 울었다. 거짓으로 증언하면서 딸한테도 미안한 게 많았는데 이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라고 밝혔다.
26일 울산지검 김효준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며 피고인의 위증교사 혐의를 발견해 기소한 사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최미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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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비용 등 피해자에 실질적 지원도
A 씨는 올 4월 위증교사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져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A 씨의 해코지가 두려웠던 김 씨와 딸은 검찰에서 이사 비용 지원을 받아 거주지를 옮긴 상황이다. 실제로 A 씨가 김 씨에게 협박한 전력이 있고 집 앞까지 찾아오기도 하면서 A 씨에 대한 김 씨의 두려움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 검사는 “검찰에서 피해자 지원을 연계해 이사비용 지원이 가능했고,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인 불안함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며 “위증도 위증교사도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저해하는 행동이다. 사법 질서를 방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도 정당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울산=최미송 기자 cm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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