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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화)

‘피싱보복 AI’ 왜 할머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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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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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망설이다 혹시나 싶어 받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은행 보안팀입니다.” 또 전화 사기(보이스 피싱)다. 이런 경험은 일상이다. 사기 전화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법이 없는 현실에서 영국 이동통신사 오투(O2)가 최근 내놓은 인공지능 할머니 ‘데이지’(dAIsy)가 화제다.



오투 조사에서 영국인 10명 가운데 7명은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를 속이려 한 사기꾼에게 직접 복수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실행에 나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매주 사기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데이지는 이런 사람들 대신 사기꾼을 농락하고 시간을 빼앗고자 개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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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머니일까. 금융 범죄자들의 주된 표적이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은 노년층이 쉽게 속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2023년 기준 국내 사기 전화 피해액은 1965억원이다. 피해자 10명 가운데 6명은 50대 이상이었다. 전자기기 사용에 익숙지 않기도 하거니와, 외로움과 정서적 유대감을 파고드는 사기꾼들의 수법에 쉽사리 넘어가는 탓이다.



데이지는 이런 생각을 역이용했다. 할머니의 임무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사기 전화로 의심되는 전화번호를 건네주면 데이지는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건다. 사기꾼은 완벽한 희생양을 만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착각이다. 인공지능 할머니들은 24시간 쉬지 않고 통화하며 사기꾼에게 고구마를 먹인다. 뜨개질 이야기부터 가족사까지, 인공지능 할머니가 쏟아내는 대화의 수렁에서 사기꾼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데이지가 사기꾼에게 빼앗은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이 사기 전화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줄어든다. 데이지가 파악한 최신 전화 사기 수법은 대중 인식 개선도 돕는다.



실제로 데이지는 한 통화에서 1시간 가까이 사기꾼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다. 오락가락 주제를 바꿔가며 사기꾼의 머리속을 어지럽혔고, 가짜 은행 정보나 개인정보를 흘리는 척하면서 사기꾼의 탐욕을 부추겼다. 두서없는 통화에 지친 사기꾼이 “다시는 전화하지 마, 이 ×××야”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전화를 끊는 결말은 얼마나 훈훈한가.





인공지능 할머니가 나 대신 사기꾼을 골탕 먹이는 풍경은 통쾌하지만, 전화 사기 범죄를 막을 근본 대책은 아니다. 전화 사기 수법은 날로 발전한다. 사기방지시스템(FDS)을 도입하고 첨단 기술과 최신 수사 기법을 동원해도 구멍은 남는다. 데이지보다 먼저 인공지능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조작해 돈을 가로챈 이들은 사기꾼들이었다. 사기꾼은 인공지능으로 사람 행세를 하며 속이려 들고, 사람은 속지 않기 위해 인공지능을 내세워 방어한다. 사람은 뒤로 빠지고 인공지능끼리 창과 방패의 전쟁을 벌이는 날도 머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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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의심 사회에서 조심은 오롯이 개인 몫이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는 게 당연해졌다. 문자로 전달받은 웹주소는 누르기 전에 확인하고, 모바일 앱 설치를 유도하면 웬만해선 무시하는 게 좋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고객님’과 ‘즉시 대출’은 무조건 긴장하고 걸러들어야 하는 사회다. 인공지능 할머니는 각자도생으로 귀결되는 시대가 주는 무기력함과 분노가 모여 만든 집단 복수극의 대리 집행자가 아닐까.



이희욱 미디어랩팀장 asad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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