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았다. 시대에도 상황에도 전혀 맞지 않는 돌발 장면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아닌 밤중’이고 완전히 ‘홍두깨’다. 한 선현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비극이고, 두 번째는 소극”이라고 말한 바 있다. 거기에 이제 우리는 인류의 더 오래된 또 다른 사태 유형을 불러내 덧붙여야 한다.
계몽과 이성, 공화와 민주가 지배하기 이전의 광소극(狂笑劇)이라는 장르다. 주인공은 비장하게 미친 듯 날뛰지만 너무 터무니없고 너무 우스꽝스러운 비정상 상황을 말한다. 인류의 한 대문호는 “내가 미친 것인지, 세상이 미친 것인지” 묻는 주인공의 물음에 “자네는 미치지 않았다”며 ‘어릿광대에 의한 소극’이라고 진지하게 답변한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반국가세력인지, 의회·정당과 80% 국민이 반국가세력인지’ 묻는 장면을 유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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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선포는 대통령의 광소극
선진 민주국가 일대 치욕·모멸
나라 정상화할 보수 선택 절실
헌법·선거법 등의 대개혁 필수
의회·시민 집단 지혜 돋보였던 밤
4일 오후 서울역에서 한 시민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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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 상황에서의 돌발 광소극에 대해 한국 국민은 밤새 충격과 경각심과 진지함을 갖고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질상 광소극은 언제든 대(大)비극으로 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사회는 위기 국면에서 발휘되는 특유의 속성인 놀라운 집단 지혜와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자신과 세계는 선진 민주국가 한국에서의 비상계엄 선포에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그 밤이 다 가기도 전에 전광석화처럼 국가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의회와 시민들의 애국적 결단과 능력에 또 한 번 놀랐다.
‘정치갈등’과 ‘권한충돌’ 현상에 대해 대통령이 헌법파괴와 법률위반을 통해, 즉 군대와 경찰을 통해 제압하려 한 방식에 맞서 헌법과 질서를 준수하면서 유혈 없이 평화적으로 극복해낸 것이다. 크게 상찬받아 마땅하다. 기습공격처럼 단행된 전격적 계엄 상황 및 예외 상태 선포에 대해 정당과 의회와 시민사회는 정확하고 신속한 상황 판단과 대응으로 질서정연하게 정상상태를 복원했다. 의회주의와 민주주의 파괴를 위한 대통령의 불가예측성·전격성·불법성에 맞서 의회와 정당과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과 결집 속도, 합법성도 못지않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반영한다.
민주공화국 운영의 요체는 대화와 타협, 설득과 조정이다. 그런 점에서 검찰과 관료에 의존한 불통과 일방주의, 검찰주의와 사법주의는 정부가 급속도로 위기에 빠진 근본 이유였다. 0.73% 차이의 대선 승리, 총선의 기록적 대패, 최악의 지지도를 드러낸 민심지표에도 불구하고 난정(亂政)은 멈추지 않았다.
민주적 타협과 조정이 없다 보니 대통령 개인의 준비 없는 즉흥적 제안과 찍어누르기, 과격한 추진과 충돌, 전격적인 중단과 후퇴의 사례가 국정의 온갖 부문에서 빈발했다. 일방주의와 갈팡질팡 행보의 극단적인 만남이 결국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헌법파괴와 계엄선포 차원까지 비약하고 말았다. 역사는 미래에 더 가혹하다. 마지막 계엄 통치 시행자 전두환은 안티고네의 비극을 완전히 뒤집어 지상 어디에도 뼈를 묻지 못하고 있다. 광소극 또한 비극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법률적·형사적·정치적 책임은 온전히 대통령과 연루된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 시대착오적 폭거로 인한 생채기와 자국은 이 나라 미래와 후손에게 두고두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또, 세계 어디를 가든 선진 민주국가의 국민과 청년으로서 가졌던 당당한 자부심에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갖게 한다. 가슴 한쪽에 간직하고 있던 국민 자존심에 대한 일대 먹칠이다.
그래서 더욱, 21세기 들어 계엄과 쿠데타를 치른 나라들의 상태와 위상, 문명과 민주주의를 보면 OECD 10위권 국가에서의 이번 광소극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경제·무역·과학·기술·자유·민주주의·인권·의료·교육·문화·예술·문학의 영역에서 이 나라가 세계에 끼치고 있는 영향과, 또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비추어 이 광소극은 실로 침통하다. 그게 우리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가장 안타깝고 부끄럽다.
진영대결 넘어선 통합정부가 대안
이제 미래를 말하자. 위헌·위법세력의 질서 있는 퇴각과 대한민국 재건을 위해서는 보수의 지혜와 역할이 다시 한번 중요하다. 건국과 공산 침략 저지와 산업화의 큰 업적은 물론, 헌정 수호와 민주 발전에서도 한국 보수의 지혜는 자주 나라를 살렸다.
첫 번째는 1987년 4·13 호헌 선언과 독재연장 기도에 맞서 6·29선언으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한 때다. 두 번째는 누란의 외환위기를 맞아 건국 이래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연합정부 수립에 합의한 때다. 세 번째는 국정농단 사태를 맞아 62명의 의원이 탄핵에 찬성하여 광장의 국민 요구에 부응해 평화적·헌법적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때다. 네 번째로 이번 비상계엄 상황에는 18명의 의원이 계엄 해제에 동의하여 진영을 넘는 한뜻을 보여주었다.
현대한국의 흐름을 바꾸고 나라를 정상화한 이 결정적인 네 번에 걸친 보수의 지혜는 모두 대한민국의 국격 상승과 헌정 발전, 민의 수용과 민주주의 역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차지한다. 진영과 권력을 넘어 나라 사랑과 국민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국민의 뜻을 따라 헌법파괴 세력과 결별하는 보수정당의 지혜가 대한민국을 다시 살릴 것이다.
끝으로, 대한민국 회복과 번영을 위한 핵심 과제를 생각해본다. 대한민국 리셋을 말한다. 첫째, 윤석열 정부와 검찰지배의 동시 극복이다. 전두환 체제의 붕괴로 군부독재가 철폐되었듯, 윤석열 정권의 퇴진은 검찰국가의 확실한 극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둘째, 진영대결 정치의 종식이다. 극단적 진영대결로 인한 적폐청산과 검찰 정치 대신 탄핵연대 계승과 여야공존의 정치를 했을 때에도 과연 또 다른 적폐청산을 염원하는 검사 정부의 탄생이 가능했을지 엄히 물어야 한다. 연합과 통합정부가 길이다.
셋째는 관료와 정부 주도의 좁은 나라 운영 방식의 대전환과 대혁신이 절실하다. 무지·무능·무법·무도의 4무(無) 윤석열 정부에서 극명히 드러났듯 민간 영역은 이제 능력과 창의, 애국심과 전문성에서 정부·관료·검찰 부문을 넘어선다. 한국은 인재가 넘치는 나라다. 자율과 민관협치가 길이다.
넷째는 혁명적인 제도 혁파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큰 나라다. 국정의 근본 판단과 결정, 정책과 인사를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태는 정녕 위험하다. 이번에 확인되었듯 대통령 개인 리스크가 너무도 크다. 이 상태는 더 이상 방치해선 결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지혜를 모으자. ‘제왕’과 ‘식물’을 왕복하는 5년 단임의 대권 철폐가 최우선 과제다. 대한민국 재조를 위한 헌법과 선거법과 정부조직법의 대개혁과 대타협을 촉구한다.
이 황망한 난리를 보고도 좋은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또 다른 광소극을 맞게 될지 모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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