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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한강 "12살때 본 광주 사진첩,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의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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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

"장편소설 쓸 때 질문들 견디며 그 안에 살아"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가 한강이 여덟 살 때인 1979년에 쓴 시다. 한강은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던 중 여덟 살 때 쓴 자신의 시를 발견했다. 낡은 구두상자 속에서 자신이 여덟 살 때 손수 만든 시집을 발견한 것이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스테이플러로 찍어 중철 제본한 표지에 어엿하게 '시집'이라고까지 적은 책자에는 여덟 편의 시가 담겨있었다. 여덟 살 소녀 한강이 서울로 이사를 앞두고 보물 같은 자신의 시를 정성껏 정리해 보관한 것이다. 여덟 살 한강은 1980년 1월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사랑이란 우리의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 8살 한강과 연결된 지금의 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지난 7일 오후(한국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지난해 이사하던 중 자신이 여덟 살 때 쓴 시를 발견한 일화를 소개하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여덟 살 때 자신의 쓴 시를 보며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강연에서 한강은 미리 준비한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차분한 목소리로 읽었다.

30여분간 이어진 강연에서 한강은 자신의 소설 다섯 편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게 된 과정과 그 내용을 소개했다.

아시아경제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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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시와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하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7년이 걸리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이 특별히 매혹적이라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자신이 질문 속에 산다고 말했다.

한강은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 된다"며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어 "하나의 장편 소설을 쓸 때마다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강은 가장 먼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집필한 세 번째 장편소설 '채식주의자'에 대해 설명했다.

채식주의자를 쓸 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질문은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였다고 밝혔다.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와 '희랍어 시간'을 쓸 때의 질문들은 조금씩 더 나아갔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질문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였고 '희랍어 시간'을 쓸 때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였다.

마침내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희랍어 시간' 다음 한강이 쓴 장편소설은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였다. 하지만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뒤 2012년 봄까지만 해도 광주를 다룬 소설을 쓰겠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한강은 마침내 삶과 세계를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20쪽가량을 쓴 뒤 소설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의문들을 자신의 안에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한강은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는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고 했다.

한강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갖게 된 계기는 12살 때 처음 본 5·18 사진첩이었다. 한강은 서가에 거꾸로 꽂혀있던, 5·18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다고 했다.

한강은 사진첩을 보며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이 새겨졌다고 했다. 한편으로 총을 맞은 사람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됐다"고 했다.

한강은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광주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900여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9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 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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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로
당시 한강이 안고 있는 질문은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였다. 질문이 앞으로 나아가고 소설의 방향이 정해진 계기는 5·18 당시 마지막까지 항쟁하다 숨진 한 야학 교사가 마지막 밤에 쓴 일기 덕분이었다. 야학교사는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한강은 "소설의 방향을 벼락처럼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두 개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한강은 5·18 때 목숨을 잃은 중학생 동호를 앞세워 소설 '소년이 온다'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라며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웃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한강은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여덟 살의 자신이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있다고 썼듯 그것이 내 삶에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움이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강은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며 강연을 마쳤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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