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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김미월의쉼표] 이것이 정말 소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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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한 여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가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수업을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평소 강의실 구석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대규모 집회에 나간다니, 게다가 이렇듯 당당하게 사유를 밝히고 결석을 예고하다니.

사실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건 없건 성격이 외향적이건 내성적이건 누구나 충격과 분노 속에서 거리로 당장 뛰쳐나가고 싶어질 만큼 지난주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무계한 재난이요 비극이었다. 학생은 메일에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믿기지 않는다. 차라리 소설이면 좋겠다’고 썼다. 소설을 배우는 학생이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참담했을 것이다. 나는 답장에 그렇다고, 하지만 이것이 정말 소설이라면 첫 장도 넘기기 전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망작일 거라고, 플롯도 없고 인과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도 없고 그러니까 독자를 설득할 요소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포털 사이트 상단에 있는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 어떤 중년 남성이 탄핵 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국회의사당 근처 빵집에서 수백만 원을 선결제했다는 기사였다. 그 외에도 커피 수백 잔을 결제한 사람 등 비슷한 내용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집회 현장에서 여자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 여성들이 애를 먹자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한산한 남자 화장실을 쓰게 하고는 돌아가며 화장실 바깥에서 보초를 섰다는 기사, 집회가 끝난 후 참가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쓰레기를 정리하고 거리를 청소했다는 기사, 대학교수들이 어지러운 시국을 겪는 학생들에게 미안해하며 기말고사를 철회하거나 과제를 축소해주었다는 기사들을 읽으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같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나야말로 메일 보낸 학생에게 참 소설 같은 상황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고, 이것이 정말 소설이라면 플롯도 없고 인과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데 어쩐지 끝까지 읽고 싶어진다고. 이렇게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고 꿈꾸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러니까 최소한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은 있어서 이 소설의 결말을 상상하고 싶어진다고 말이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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