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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망상에 의한 쿠데타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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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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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에 탱크가 도시를 포위했고, 군인들이 국회와 방송국 등 핵심 시설을 장악했다. 군인들은 3주 뒤 치러질 선거에서 집권이 유력한 정치인을 체포했다. 곧이어 위험인물의 명단을 발표하고, 그들을 붙잡아 격리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어났다.”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전통적 방식’이란 글에서 쿠데타를 묘사한 대목이다. 그는 쿠데타는 이미 세계에서 여러번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때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공식처럼 알고 있다고 썼다. 앞서 인용한 상황은 실제로 1967년 4월21일 밤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런시먼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방식의 쿠데타는 사망했다고 봤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스꽝스럽게 끝날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는 외려 국가를 무력으로 전복하지 않으면서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새로운 형태의 쿠데타에 주목했다. 정부의 실패, 기후위기, 팬데믹, 정보 독점 같은 민주주의 내부의 숨은 위험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지난 3일 밤 한국에서 비상계엄을 빙자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속속 드러난 정황을 보면 이번 사태는 권력자가 군과 경찰을 동원해 국가를 찬탈하려 한 전형적인 친위 쿠데타의 양상을 띠었다. 무덤에 들어간 줄 알았던 쿠데타가 현실로 걸어 나온 것이다. 자유선거와 삼권분립으로 구축한 민주주의의 성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보여준 셈이어서 더욱 충격이 컸다.



미국의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는 무력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는 쿠데타의 한 유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행정을 장악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유예하는 것, 특정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거 과정을 조작하는 것, 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 권력을 가진 이들이 민주주의를 야금야금 약화시키는 것 등을 쿠데타의 범주에 넣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는 이처럼 총성 없이 일어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이후 줄곧 민주주의를 유예하고, 훼손하고, 약화시켰다. 이번 쿠데타는 그가 취임한 날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급기야 지난 12일 담화에선 극우 유튜버들이나 주장하는 선거 부정 의혹을 계엄령 발동의 이유로 들었다. ‘망상’이라는 정신병리학적 요소가 그동안 숨겨왔던 쿠데타의 무력을 격발한 것이다. 쿠데타의 범주에 새로운 유형이 추가될 법하다.



유강문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논설위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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