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늦게 온 탓에 단풍 위로 눈이 하얗게 쌓였다. 정애리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제공 |
김형준 |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지구의 기후가 온난화를 지나 끓고 있다는 표현을 한다. 기후변화의 마지노선이라 불려왔던 1.5도를 이미 넘나들고 있다. 올여름이 앞으로의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을 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난 7월 지구는 175년간의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웠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 곳곳에서 더 무자비한 폭염이 내리쪼이고 더 흉포한 홍수가 할퀴는 여름을 매해 경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다. 남한 영토를 종단해도 500㎞에 그친다. 그런데도 어느 지방이 가뭄에 신음할 때 동시에 다른 곳에는 폭우가 쏟아지곤 한다. 고랭지 배추가 녹아내리고 양식장의 바다 생물은 폐사하고 있다. 사과가 강원도로 이주하고 동해에서 명태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폭염을 피해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더 높은 곳, 더 북쪽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밥상에도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11월 말, 서울에는 첫눈의 이름으로 폭설이 내렸다. 두주 전만 해도 낮 최고 기온이 20도를 넘나들었으나 대설경보가 내려졌다. 1907년 관측이 시작된 이래 11월 적설량으로는 압도적인 최고치를 기록했고, 가을이 늦게 온 탓에 아직 선명했던 단풍 위로 하얗게 쌓인 눈은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마냥 아름답다고만 보기 어려운 까닭은 내린 눈의 무게가 평소보다 훨씬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물은 무겁다. 각 변이 1m인 정육면체에 물을 담으면 약 1톤에 이른다. 소형차 한대 정도의 무게다. 눈은 보통 물에 견줘 5~20배가량 가벼워서 같은 정육면체에 눈을 담으면 50~200㎏ 정도이다. 하지만 11월의 첫눈은 그보다 두배 이상 무거운 습설이었다. 공장이나 시장의 지붕이 무너지고 거리의 구조물이나 나무들이 쓰러졌다. 서해의 해수면 온도가 초겨울까지도 이상 고온을 유지한 탓에 수증기가 대기 중에 대량으로 공급된 탓이다. 앞으로 이런 일들과 익숙해져야 한다. 뉴노멀이라고 한다. 재난의 일상화라고 불러도 좋다. 현재의 기후가 이미 우리 사회의 대응 한계를 훌쩍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기후로 취약계층은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그들의 취약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후변화를 인권의 문제라고도 한다. 기후소송에 대한 헌법 재판소의 판결도 이들과 미래세대를 위해 지금을 바꾸라 한다. 바꿔야만 한다. 지난 11월11일부터 24일까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렸던 제29차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9)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이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규 기후재원 조성 목표(NCQG)가 합의되었고, 파리협정에서 합의되었던 국제탄소시장의 세부 이행지침이 마련되었다.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더라도 우리 인류가 보다 정의롭고 보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늘의 화석상’ 1위에 선정되는 오명을 얻었다.
속도에 시간을 곱하면 이동 거리가 된다. 이와 같은 물리학의 법칙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 사회의 방향에 시간이 곱해지면 사회적 성취가 된다. 사회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보해 가겠지만 반대 방향이라면 그 사회는 퇴보해 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방관의 시간이 곱해지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혼란도 민주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방관이 만들어 냈고, 기후위기 또한 인류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지구 환경의 가치에 대한 그릇된 판단의 누적이다. 민주주의도 기후도 이제 심판의 시간이다. 다만 기후의 경우에는 심판의 주체가 지구이고 그 대상은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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