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스님(구리 신행선원장) |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어린 시절 새 하얀 계절의 느낌이 으스름 쌓이기 시작한 어느 겨울 신새벽에 누구의 흔적도 없던 눈 덮인 그 세상은 아직도 그대로다. 한 걸음 내딛기도 아까운 백색의 세상을 몇 걸음 걷다 아쉬움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고는 한다.
눈 덮인 들판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유명한 서산대사의 답설(踏雪)이라는 시다. 우리는 기억에 의지해 생존한다. 관계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인간이라는 단어처럼 관계의 정의도 각자의 기억에 의존한다. 내가 살아온 길, 상대가 살아온 모습, 서로가 공유하는 경험이 서로의 이정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그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도 매 순간의 선택으로 재정립된다. 과거를 현재에 투영하지만 현재는 생동하며 변화하는 중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과거에 의지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현상을 보라는 말이다.
예비 승려로서 승가대학에 있을 때 학인 전체의 동안거 반결제 원족 산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이 있었다. 고속도로 화장실에 들렀다가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대중이 타고 온 버스 바로 옆에서 어묵을 판매하고 있었다. 추운 날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찬 바람에 순식간에 헛어지며 그 향기를 시방법계에 퍼뜨리고 있었고 그 향기는 기어이 내 콧구멍에 여지없이 스며들어와 내 뇌리를 침범하고는 취약한 기억과 추억을 유린하며 흔들어댔다. 나는 그 향기에 이끌려 그곳을 향해 걸었다. 주변의 시선도 옆의 버스에 타고 있을 대중 스님들도 이미 십만팔천리 멀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든 일이 순서대로 진행됐고 마음 한편에 솟아오른 '이러면 대중 참회를 해야 하는데…' 같은 생각도 뭐 까짓거 참회하면 되지. 추운 겨울날 어묵 정도는 먹어도 되잖아? 참회하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그날 밤 대중의 질타가 있었고 덕분에 삼경 후(밤 9시쯤) 지장전에서 지장보살님을 친견하며 1시간 동안 기쁜 마음으로 참회의 절을 올렸다.
우리는 삶의 많은 순간 속에서 욕심에, 혹은 감정에, 아니면 어리석은 고집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을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잘못에 대한 참회는 기꺼이 하고 사는 것이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침 속에서 괴로움을 적게 하는 방법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업에 업을 더하고 또 그것들이 뒤섞여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를 맞이해 끝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아쉬운 미련과 억울함, 원망 등 집착의 찌꺼기를 비우는 수행이 보시하는 것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배푸는 것을 통해 번뇌의 집착도 내려놓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며 동시에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수행자가 수행하는 것이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어찌 실수와 방황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통해 성찰하고 수정하고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아무런 흔적 없는 눈길을 앞에 두고 있다. 지나온 발걸음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라도 한 번도 걷지 않은 그 길을 우리는 용기 있게 내디뎌야 한다.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는 것은 방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자세를 바로잡고 나아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그런 태도가 스스로에게 존중감을 가지게 한다. 우리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마음의 상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마음속에 후회와 부끄럼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앞에 둔 사람 중에 오랜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화해를 청하고 용서를 빌거나 참회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길이다.
혜원스님 구리 신행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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