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영 산업1부 기자 |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14일 오후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약 11일의 시간 동안 한국 현대사는 또 한 번의 비극을 마주해야 했다. 그 급박한 시간 흐름 속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비극의 또 다른 상흔이 곳곳에 뻗어 있었다.
11일의 시간 동안, 재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한 주 전 대통령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구광모 ㈜LG 대표 등 4대 그룹 총수에게 “트럼프 당선 이후 대응 방향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비공개 회동을 제안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각개 대응에 바빴던 4대 그룹은 대통령실 제안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그 주 주말 대통령실에 전략 자료를 총동원해 제출했다. 그로부터 불과 사흘 뒤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당시 재계는 말을 잃은 분위기였다.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기업들은 정부와의 공조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마이크론에 TSMC까지 미 정부와 협상해 조 단위 보조금을 확정 계약하는 가운데 삼성, SK하이닉스는 아직 소식이 없다. 멕시코의 현대차·기아 공장이 트럼프 관세 정책 앞에 영업이익 19%를 날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대만, 일본 할 것 없이 이미 물밑에서 정부·기업 간 대미 공조가 긴박한데 우리만 정부 공백 상태”라고 말했다.
장면을 바꿔 보자.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4일, 4대 그룹 중 한 곳의 법무 담당자들이 ‘민주당 정권’ 시나리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해 긴급 검토에 착수했다. 전경련의 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재가입을 문제 삼을 여지는 없는지, 지난해 부산엑스포 유치전 지원은 무리한 게 없는지 등 벌써부터 걱정인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지난달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단독으로 처리한 증인·감정법이 ‘거부권’ 행사 없이 확정될 가능성에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21일까지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으면 앞으로 기업들은 국감 시 개인정보·영업비밀 자료도 무조건 제출해야 하고, 해외 출장 중인 총수들도 화상으로 증인 출석을 해야 한다.
이 같은 경제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재계는 8년 전 겪었던 탄핵 정국 트라우마에 목소리도 차마 내지 못하고 있다. 비상계엄 이후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는지 묻는 질문에 4대 그룹 한 관계자는 “정국 급변 상황에 바로 회의를 열었다는 얘기가 나가면 나중에 ‘얼씨구나 했냐’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경협은 증인·감정법 관련 대책이 있냐는 질문에 “시국이 시국인 만큼 우린 전면에 나서기 부담스럽다”고 했다. 이것이 반복되는 현대사 비극이 재계에 남긴 진짜 상흔이다.
지금의 한국 경제에는 다시 상처를 딛고 일어설 저력이 필요하다. 국가 위기 상황인 만큼 여야는 민생을 위해 합의했던 경제 법안들부터 다시 추진하고, 땅에 떨어진 대외 외교라인을 수습해야 한다. 각 부처도 지금의 개점휴업 상태를 최대한 빨리 ‘온(on)’ 모드로 가동시켜야 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늘 그랬듯 지금도 앞날을 단정할 순 없다. 앞으로 새로운 리더십이 속도감 있게 경제 상황을 개선해 나간다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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