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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잊힌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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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김건희 여사 특검 투표 결과를 대형 화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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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락 | 경제산업부장



“행복한 주말 되세요.”



지난 일요일 오후. 출입문을 열고 나갈 때 커피숍 직원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어요’라고 말을 거는 듯했다. 초현실 막장극에 허우적대느라 신경 줄이 한껏 팽팽해졌던 탓일까. 아르바이트생의 평범한 인사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잠들었다.



비상계엄 선포에서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까지 열흘 남짓 동안 쉬지 않고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많은 이들이 그랬으리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공고해졌다고 믿은 건 착각이었을까.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이 녹아든 이 체제가 어떻게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단 말인가. 한번 일어난 마음속 동요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시민사회의 유쾌한 직접 행동이 파국은 막아냈다. 내란 주범과 관여자에 대한 수사는 속도를 내고 있다. 쏟아지는 제보의 힘으로 야당과 언론은 그날의 진실에 한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 무뢰배 같은 권력자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 지형도 숙성 중이다. 그러면 다일까. 이것만으로 민주주의는 회복되는 것일까.



이번에 흔들린 건 ‘절차적’ 민주주의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토대를 둔 삼권분립, 보통·비밀·평등·직접 등 4대 원칙에 기반을 둔 선거제와 같은 것들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내실을 갖추기 시작했고 이후 약 37년간 고도화된 그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성숙과 완성은 ‘절차’에 머물지 않는다. 37년간 민주주의의 절차는 발전해왔으나 민주주의의 실질이 확보됐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많은 정치·사회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고도화 기간 동안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심화하는 역설적 상황을 우리는 마주해왔다. 1987년 광장 속에서 ‘하나’라고 여겼던 시민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위기에 올라탄 이와 직격탄을 맞은 이로 나누어지고 흩어졌다. 어느 순간 ‘능력주의’가 시민사회에 깊이 침투하면서 ‘사회적 연대’가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각자도생’은 오늘날 평범한 시민의 삶의 전략, 아니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내 삶은 내가 챙기지 않으면 언제든 나락 속에 떨어진다는 불안감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연간 수백 수천만원에 이르는 재수 비용을 감내한 엔(n)수생이 대학 입시를 좌우하는 걸 본 평범한 학생들, 한껏 유연해진 직장에서 언제든 일터를 잃을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 몸 한구석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 ‘혹시’ 하면서도 선뜻 병원을 찾지 못하는 평범한 노인들…. 이들이 갖는 일상적 불안감은 계엄군이 국회를 유린할 때 느낀 공포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한다.



이런 불안감은 높은 자살률, 낮은 출산율이란 수치로도 확인된다. 청소년의 제1의 꿈이 ‘건물주’가 된 지 오래이며 공직을 민간 기업으로 가는 징검다리쯤으로 인식하는 공무원도 부쩍 늘었다. 국가와 일터의 안전망보다 코인과 주식, 부동산(이라고 적지만 실상은 빚더미)에 본인의 미래를 스스로 맡긴다. 이 위험자산이 흔들릴 때 평범한 시민은 ‘성난 투자자’로 일순간 돌변하며 ‘나라가 해준 게 뭐가 있냐’고 아우성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되뇌는 정치 엘리트들은 정작 그 운동장에 오르지도 못하는 평범한 시민이 늘고 있음을 애써 외면한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이들의 목소리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하고 결정한다. 특정 학맥, 직업, 지역의 과다 대표성은 심화하고 있지만 이미 내부자가 된 ‘한때’ 운동권이었던 정치 엘리트는 이를 문제 삼으려 하지 않는다. 볼멘소리가 나올라치면 때마침 등장한 ‘거악’을 지목하며 시민들의 시선을 돌리는 데 익숙하다.



평범한 시민의 다른 말은 ‘잊힌 사람들’이다. 내란을 옹호하느냐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국민의힘 지지율이 20% 남짓인 건 얼마간은 잊힌 사람들의 울분과 상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탄핵 이후 과제는 수십년간 서서히 내파된 민주주의의 실질을 되살리고 강화하는 일이며 그 핵심은 잊힌 사람들을 다시 끌어오는 일이어야 한다. 수년 뒤 ‘내가 이런 꼴 보려고 그 겨울에 탄핵봉을 들었나’란 푸념이 무성하다면 정치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것이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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