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만큼이나 반역사적인 국민의힘
위헌 위법 싸고돌면서 무슨 보수
보수가치 회복 없인 李 극복도 없어
위헌 위법 싸고돌면서 무슨 보수
보수가치 회복 없인 李 극복도 없어
심야에 대경실색한 지인들과의 통화는 비명에 가까웠다.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합리보수를 자처하던 점잖은 이들이 그렇게 쌍욕을 해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윤석열(대통령)의 벌건 얼굴은 '야당 경고용 계엄' 언사만큼이나 초현실적이었다. 국민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고작 이런 자에게 하찮게 취급당한 모욕감에 치를 떨며 밤을 새웠다. 벌써 보름 전이다.
전시 사변 등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계엄 발동은 명백한 헌법위반이다. 이 위헌적 행위로 반대자를 구금하고 국민기본권을 압류하려던 시도는 내란죄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이다. 해석이 아닌 판례다. 헌재심사는 이 자명한 틀에 법 논리를 부여하는 과정일 것이다. 측근의 국정농단으로도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그 밤 윤은 자폭했고 정치생명은 그 순간 끝났다.
단 6시간 만에 나라가 결딴났다. 경제 외교 민생은 올스톱됐고 국격은 진창에 처박혔다. '계엄의 대가는 한국민들이 (두고두고) 할부로 치르게 될 것'이라고 미 경제매체 포브스가 앞서 짚었다. 만에 하나 윤이 회생한다면 대한민국은 진창 정도가 아니라 탈출 불가능한 무저갱에 갇힐 것이다. 곧 국가의 파국이란 뜻이다.
윤만큼이나 기막힌 건 국민의힘이다. 그래도 '헌법을 준수하고…국가이익을 우선으로 직무를 양심에 따라 수행'하겠다고 선서한 국회의원들이다. 석고대죄가 마땅했고 친윤이라면 더 고개를 파묻어야 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핵 찬성 동료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당권을 접수하곤 일로 윤 옹호로 내달린다. 딱 그 머리에 걸맞은 그 수족이다.
그들이 핑계 삼는 박근혜 탄핵 트라우마는 알량한 자리보전 의도가 앞선 오진(誤診)이다. 그때도 탄핵으로 망한 게 아니라 탄핵에도 정신 못 차려 망한 것이다. 탄핵 직후여서 야당에 정권을 내준 건 그렇다 쳐도 한참 뒤인 2020년 총선에서도 180 대 103의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게 그 때문이다. 보수쇄신을 주장한 유승민 같은 개혁론자들을 배신자로 몰아 쫓아낸, 그 군내 나는 수구 체질의 후과가 지난 두 차례 총선 결과이자 이번 계엄 망동이다.
이재명 불가론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요행히 지난 대선 승리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염증에 이재명 같은 결함투성이 상대를 만난 덕분이다. 그는 반민주성과 독선, 부도덕, 부정의와 불공정 등에서 윤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닮았다. 그래서 국힘의 대선전략은 재판날짜 계산이 아니라 윤, 이와는 다른 합리보수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정공법이다. 이대로 가면 이재명이 아니라, 국힘이 이대로 가면 이재명임을 왜 모르는가.
보수 진보의 이념적 차이는 우리 사회에선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성장 분배의 균형에는 원론적 합의가 돼있고, 대북 외교노선에서의 차이는 국제환경에 따라 유동적이다. 오히려 구분점은 태도다. 변혁 지향의 진보가 더 도전적이고 거칠 수밖에 없는 반면, 체제방어에 비중을 두는 보수는 법치 책임 관용 품격 등의 덕목에서 더 낫다는 게 통념이었다. 작금의 국힘을 보면서 이 고정관념을 거둔다. 지적한 어떤 기준으로도 국힘은 보수가 아니다. 국힘은 다만 보수를 참칭하는 가짜보수 집단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러니 기댈 건 진짜 보수와 중도층 국민의 각성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러 보수논객들조차 '그래도 이재명은 불가' 논리만으로 윤의 구명을 돕고 친윤의 입지를 넓혀줌으로써 이재명의 길을 닦아주고 있다. 하루빨리 친윤의 오도(誤導)에서 벗어나 윤석열을 지우고 새로운 체질변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하는 것 외에 보수진영엔 어떤 선택지도 없는데도. 시간이 정말 없다.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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