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0 (금)

“나처럼 수학여행 못가는 학생 없게”… 20년간 월급 쪼개 기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2024 아너 소사이어티] [3] 울산 직장인 1호 아너 심필보씨

조선일보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쪼개 2억5000여만 원을 기부한 심필보씨가 지난 18일 울산 중구 참나눔회 무료 급식소에서 식판을 정리하며 활짝 웃고 있다. 심씨는 정년 퇴직 후 봉사 단체 참나눔회를 꾸려 매주 2회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중학생 때 수학여행 못 간 게 한이 돼 나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꼭 하겠다고요.”

지난 18일 울산 중구의 비영리 봉사 단체 ‘참나눔회’ 사무실에서 만난 심필보(65)씨는 지난 20년간 2억5000여 만원을 기부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심씨는 2016년 사랑의열매에 1억원 기부 약정을 하고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울산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130명 가운데 가입 당시 직장인이었던 건 심씨가 유일하다.

심씨는 1971년 중학교 당시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때 집안 사정이 어려워 서울로 가는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모친이 ‘장날이니 장바구니를 장터까지 들어다 달라’고 해 별생각 없이 나섰는데, 마침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던 친구들과 마주치게 됐다. 심씨는 “부러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 서러운 마음에 길 모퉁이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른이 되면 아이들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심씨는 고교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85년 유공(현 SK에너지)에 입사했다. 부친상을 당한 이후 농사를 지을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던 중에 친구가 건넨 유공 직업훈련원생 모집 원서를 썼다. 1차 선발된 53명 가운데 1등으로 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입사했다. 1986년 아내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기부에 나선 것은 2005년이다. 심씨는 “직장 생활을 20년 하다 보니 여유가 생겼고, 어렸을 때 결심했던 일을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300만원짜리 수표를 끊어 모교인 농소중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그의 월급은 약 400만원. 심씨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 “집안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전달했다. 이후에도 틈틈이 월급을 모아 매년 300만원씩 장학금을 보냈고, 2016년부터는 500만원으로 늘렸다.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2021년까지 총 6300만원의 장학금을 모교에 기부했다. 심씨는 “장학 혜택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선배님처럼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직장 다니며 월급 쪼개 모은 1억 2000만원을 기부한 심필보 씨가 사랑의 열매 인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김동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심씨는 첫 장학금 기부 이후 매달 20여 만원씩 사랑의열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한적십자사, 굿네이버스, 한국여성의전화 등 각종 사회복지기관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수재의연금 등 일회성 기부도 꾸준히 했다. 심씨는 “월급을 받으면 ‘얼마를 기부해야겠다’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듯 꾸준히 기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심씨는 국민 대부분이 가입해 있다는 실손보험도 없다. 아이들이 크면서 학비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자, 후원금을 충당하기 위해 2007년 실손보험을 해약했기 때문이다. 심씨는 “아동과 결연을 맺고 후원금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 돈을 끊으면 아이들이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며 “나는 월급을 받고 언젠가는 사정이 좋아질 테니, 보험을 해약하더라도 아이들을 돕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심씨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하며 5000만원을 기부했고, 이듬해인 2017년에는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5000만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심씨는 “퇴직하고 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빚이라도 내면 정년까지 매달 월급 받아서 갚으면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이후 매달 50만~60만원씩 월급을 쪼개 모으고, 성과급으로도 마이너스 통장을 메웠다. 심씨는 “저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하는 모습을 보고 나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심씨는 퇴직 후 ‘참나눔회’라는 봉사 단체를 꾸렸다. 2022년부터는 무료 급식 봉사도 시작했다. 매주 두 차례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나눠주고 있다. 지난 19일엔 199번째 봉사를 했다. 소액 기부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기부한 돈이 2억5000여 만원인 심씨는 “단번에 내라고 했으면 이만큼 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기부는 형편에 맞게 차근차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쓰면 일시적으로는 행복하지만, 며칠 지속되지 않는다”며 “그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행복이 훨씬 오래간다”고 했다.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문의 080―890―1212

[울산=오경묵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