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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앵커칼럼 오늘] 저 아름다운 손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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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지금 어디 계시든 집으로 가십시오."

지구로 돌진하는 거대 혜성 폭파 작전이 실패하고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섭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아니, 소망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군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신을 믿습니다."

폭파 작전에서 실명한 젊은 선장에게 베테랑 노(老) 조종사가 다가갑니다.

"풋내기들, 읽을 종이 책 안 가져왔지?"

지구 멸망이 닥쳐 오는 절체절명의 시간, '모비 딕' 읽어 주는 소리가 암울한 우주선을 잔잔하게 울립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모비 딕. 제1 장. 내 이름을 이슈멜이라고 해 두자. 몇 년 전 일이었지…"

세상이 막막할 때 바다로 간 이슈멜처럼, 대원들은 핵폭탄을 실은 채 혜성으로 돌진합니다.

"메리, 당신을 잃은 뒤 단 하루도 잊지 않았소. 이제 당신 곁으로 가리다."

시인 신경림이 한 해를 보내며 가슴 저려했습니다.

'얼마나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높은 데서 벌어지는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발길질에…'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투박하고 부르튼 손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끌고 가는 것은 큰 몸짓과 잘난 큰소리가 아니라는 걸.'

이 황망한 한 해 끝자락, 성남 어느 납골당에서 조촐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지난 5월 세상을 뜬 홍계향 할머니께, 나눔의 빛을 떨친 '아너 소사이어티' 인증패를 공동모금회가 바쳤습니다.

할머니는 떠나기 일 주일 전 병상 베개 밑에서 빛바랜 통장을 꺼내 건네며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경로당 따신 밥…"

2천 여 만원이 든 통장, 남은 재산 전부였지요. 생전에 행상, 노점상, 청소, 공장 일을 하며 얻은 7억짜리 집도 맡겼습니다.

그렇게 떠난 걸음이 시인의 홀가분한 귀갓길 같습니다.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누군가 영문으로 올린 찬사입니다.

'한국 시민들은 나라가 어둠에 빠지면, 집에서 가장 밝은 것을 들고 나온다.
(Korean citizens come out with the brightest thing from home when the country goes dark)'

12월 20일 앵커칼럼 오늘 '저 아름다운 손들을 보라' 였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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