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공연이 삶이 되고 삶이 공연이 되는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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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그날 밤 이후, 한국 사회 전체가 격랑에 휘말린 느낌입니다. 이 시국에도 저는 공연을 보고, 예술가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기사를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게 'SBS 문화전문기자'로서 제가 맡은 업무니까요.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지난 5일, 배우 인터뷰를 위해 연극 '타인의 삶'을 보며 저는 작금의 한국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에도 칼럼을 썼습니다만, 이 연극은 독일 통일 이전의 동독을 배경으로,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 그리고 이들의 일상을 낱낱이 도청하는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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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에서 묘사되는 동독의 상황은 비상계엄 치하의 세상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드라이만은 비교적 정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작가였지만, 절친한 연출가 예르스카가 체제 비판적인 연극을 했다는 이유로 7년간 활동을 금지당한 끝에 자살하자,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르스카의 자살을 외부 세계에 알리는 글을 발표하기로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 목숨을 끊었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대답 대신 당신의 이름을 국가보위부에 넘겨줄 겁니다. 그럼 국가보위부는 ... 국가 체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국민들이 스스로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당신을 잡아가겠죠. 1977년, 우리나라는 자살자 수 집계를 중단했습니다. '스스로 살인한 자.' 그들은 자살한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범죄, 즉 살인을 저지른 죄인 숫자에 더해집니다. 그러나 자살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 집계되지 않은 사람 중엔 알베르트 예르스카라는 위대한 연출가가 있습니다. 그는 12월 4일에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드라이만이 쓴 글을 들으면서 자살에 관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예르스카가 자살한 날짜가 마침 12월 4일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비상계엄 바로 다음 날, 제가 연극을 보기 하루 전날. 1980년대 동독의 이야기가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일처럼 확 다가오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연극에서 드라이만 역으로 열연 중인 배우 김준한 씨는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출연해 "다른 건 다 부족하더라도, 이 시대의 아픔은 꼭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배우가 연극에 담으려 한 '시대의 아픔'은 1980년대 동독을 넘어 2024년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됐습니다.
▷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배우 김준한 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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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2월 7일, 대통령 탄핵 소추안 1차 표결이 있었던 날에도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창작진 인터뷰를 위해 봐야 했던 이 공연은 뮤지컬 '틱틱붐(tick, tick, Boom)'이었습니다. 틱틱붐은 뮤지컬 '렌트(Rent)'의 공연 개막일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작곡가 조너선 라슨(1960~1996)의 유작입니다. 라슨은 사후에 '렌트'로 토니상과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하며 전설이 되었습니다.
라슨은 '틱틱붐'에서는 30살 생일을 앞두고 신작 낭독 공연을 준비 중인 뮤지컬 작곡가, 즉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틱틱'은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 '붐'은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입니다. 작곡가는 마치 폭발을 앞둔 시한폭탄을 장착하고 사는 듯 환청에 시달리는데, 이는 그가 느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상징합니다.
'틱틱붐'은 조너선 라슨이 생전에 모놀로그 형식으로 직접 선보였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만인 2001년 그의 친구들이 3인극으로 다시 구성해 미국에서 정식 초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영화도 유명하죠. 이번 한국 공연은 3인극인 원작에 앙상블 배우 5명을 더하고, 영화 번역가로 유명한 황석희 씨의 번역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처럼 다시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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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공연을 보면서도 작금의 한국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생계를 겨우 유지하고, '브로드웨이의 미래'가 될 새 뮤지컬에 매달리고 있지만 확신은 없는 주인공이,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가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을 언급하는 대목입니다.
"지금은 1990년, 거지 같은 시대라고. 흥미진진한 시대도 아니고 격변의 시대도 아니야. 보수적이고 모험심도 없고 둔감하고 상상력도 없는, 재미 더럽게 없는 시대. 아, 이렇게 설명하면 좀 쉽겠네.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지?"
순간 저는 12월 3일 격앙된 표정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그 얼굴을, 그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이 뮤지컬에서 한국 대통령 얘기를 할 리는 없지만요. 배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사를 이어갔습니다.
"역대급 꼰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왕꼰대, 조지 부시야. 조지 부시 몰라?"
객석에선 와~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저때 미국 대통령이 조지 부시였구나! 저도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조지 부시가 '왕꼰대'였더라도 지금 이곳의 대통령처럼 계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고요. 뮤지컬을 보던 중이었지만 새삼 현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울분이 느껴졌습니다. 이 대사는 원래 대본에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듣는 느낌은 또 달랐던 겁니다.
'틱틱붐'은 끝까지 주인공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계속 가난에 시달리고, 친구는 에이즈에 걸리고, 연인은 떠나갑니다. 신작 낭독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도 이 작품을 공연장에 올릴 제작자는 나서지 않습니다. 30살 생일이 됐지만, 이뤄놓은 것은 하나 없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안과 고민과 두려움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왜 우린 불장난을 할까? 왜 우린 불꽃에 손댈까?
왜 우린 아플 걸 알면서 난로에 손을 대는 걸까?
왜 우린 위험한 밤거리에 등불을 걸지 않나?
왜 사고를 겪어야만 진실을 깨닫는 걸까?
새장과 하늘, 새는 어떤 걸 택할까?
행동으로 외쳐, 소리 높여. 두려워하지 말고.
왜 우린 최선을 다할까? 적당히 살아도 되는데.
왜 우린 상사의 억지에도 고갤 끄덕일까?
왜 우린 안전한 길을 두고서 험난한 길을 갈까?
왜 실망할까 두려워 싸움을 피하는 걸까?
새장과 하늘, 새는 어떤 걸 택할까?
행동으로 외쳐, 소리 높여.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함에 고개 숙인 마음들이 어떻게 날아오를 수 있나?
내 앞에 놓인 버거운 현실 도피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
왜 우린 맞지 않는 사랑 곁에서 주저할까?
왜 홀로 되는 밤이 두려워 고통 속에 살까?
왜 우린 무책임한 자를 따를까?
말해줘. 폭풍을 겪어야 비로소 혁명이 시작되는 이유를.
왜 이 세상엔 아픔이 많은 걸까?
새장과 하늘, 새는 어떤 걸 택할까.
행동으로 외쳐, 소리 높여. 두려워하지 마.
틱틱붐의 뮤지컬 넘버 'Louder than Words' 가사를 곱씹어보면서 공연장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집회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케이팝 그룹 응원봉을 들고나온 젊은 여성들이 정말 많았고, 다채로운 깃발들이 휘날렸습니다. 이날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표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개표도 못하고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됐습니다. 저는 실망감에 휩싸였지만, 지친 기색 없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케이팝 응원봉들이 밤거리를 밝게 수놓는 모습은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틱틱붐'이 보여줬던, 힘겨워도,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떠올렸습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든 여의도 국회 일대는 세대를 초월하는 거대한 공연장 같았습니다.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무대가 펼쳐졌고, 로제의 APT에 윤수일의 아파트가 절묘하게 이어졌고, 케이팝 사이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고, 케이팝 노래 리듬에 맞춰 탄핵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국회의장이 가결을 선포하던 순간 울려 퍼진 '다시 만난 세계'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노래 제목대로 '세계를 다시 만난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집회 현장. 사진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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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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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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