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도피성 입대를 했어요. 군대에서도 끊임없이 진로 고민을 했죠. 복학하면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뉴스에서 ‘앞으로 소프트웨어(SW) 개발자가 전망이 좋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어요. 휴가 때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썬(Python) 교재를 사서 군 복무 중 틈틈이 공부했는데 책만 가지고는 이해가 잘 안 됐어요. 이렇게 공부하는 게 맞는 건가 의심하며 복학할 땐 컴퓨터공학과로 전과를 결심했죠.”
김민웅씨는 2024년 7월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카운티의 쿠퍼티노(Cupertino)시에 위치한 자브라(Jabra)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사진은 회사 앞. 쿠퍼티노에는 애플(Apple) 본사와 우주선 모양으로 유명한 애플 파크(Apple Park)를 비롯한 애플 캠퍼스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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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2021년 여름방학, 대학 국제처장이던 조남주 디자인공학부 교수가 산학재단이 추진하는 ‘해외 온라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알려줬습니다. 링크드인 개발자 출신 박상현(앤드류 박·Andrew Park) 테커(Techeer) 대표가 개발자 지망 대학생들을 위해 한국공학대와 함께 만든 5주 과정의 *부트캠프였죠. 박 대표는 2015년 언론을 통해 ‘안양대 출신 링크드인 빅데이터 엔지니어’로 소개됐는데요. 그해 6월 여주대학교에서 열린 ‘실리콘밸리人’ 토크콘서트에서 “나 역시 보통사람이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스펙이 실리콘밸리 진출의 절대적 잣대는 아니니 꿈을 가져보라고 북돋은 바 있죠.
‘인공지능을 응용하여 웹사이트/App 제작’이란 주제로 실리콘밸리 테크(Tech) 전문가들과 함께한 부트캠프를 통해 민웅씨는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의문들을 해소했습니다. 개발자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현업에서 어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우고 직접 만들면서 SW 엔지니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배웠어요.
2021년 겨울 실리콘밸리 한달살기 멤버들과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숙소에서 회의하는 모습. |
“4~5명이 한 팀이 돼 기획부터 *개념증명(PoC·Proof of Concept), 최종 제품 완성까지 우리 손으로 만들어보는 방식이었어요. 저희 팀은 영상 속 특정 장면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예를 들어 방탄소년단 영상을 넣고 지민을 입력하면 지민 등장 장면만 찾아주는 것)을 개발했는데요. 5명의 팀원이 각자 역할을 분배하고 소통하면서 단순히 개발만이 아닌 SW 엔지니어가 하는 일이 어떤 건지 5주 동안 온몸으로 몰입했습니다. 코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었고, 방황하던 저에게 확신을 준 터닝포인트였어요.”
부트캠프를 경험한 민웅씨에게 이론 위주의 학교 수업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현업과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커졌고 이대로 학교만 다녀서는 취업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죠. 마침 박 대표가 부트캠프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개발자 커뮤니티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참여했어요. 2021년 가을 약 30명으로 출범한 실리콘밸리 기반 성장코딩 프로그램 ‘테커’는 3년 후인 2024년 11월 150명이 넘는 개발자 커뮤니티로 성장했죠.
2021년 겨울 실리콘밸리 한달살기 멤버들과 빅테크 기업 탐방 중 애플 본사에 방문한 민웅(오른쪽에서 둘째)씨. |
2021년 겨울방학, 박 대표가 테커 멤버들에게 실리콘밸리 서니베일 지역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한달살기를 제안했습니다. 민웅씨를 포함한 7명의 학생이 함께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한국에서 취업할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코딩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개발 분야 취업시장을 잘 모르기도 했고요. 어떤 기업들이 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몰랐었는데 한달살기를 하면서 실리콘밸리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게 됐습니다. 구글·애플·메타 등 우리가 쓰는 서비스들, 산업을 리딩하는 기업들이 다 거기 있으니까요.”
짧은 기간이지만 민웅씨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곳의 일원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중국·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팀을 이뤄 하나의 목표를 갖고 프로젝트를 만들고 회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멋있었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도 참가하고, 구글 같은 기업 현직자들과 만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SW 엔지니어, 즉 개발자의 직무에 대해 폭넓게 체험했어요.
또 미국의 대학생 개발자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또 취업은 어떻게 하는지도 알 수 있었죠. 미국 대학생들은 2학년 때부터 인턴 자리를 구하기 시작해 여름방학 때는 대부분 인턴십(internship)을 경험합니다. 취업 역시 인턴십을 통해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풀타임으로 전환되는 식이죠.
2021년 겨울 실리콘밸리 한달살기 당시 CES 현장에서 한국 3D 프린팅 안경기업 브리즘(breezm) 박형진 대표와 만나 짧게 인터뷰했다. |
“실리콘밸리 기업에 취업해야겠다는 꿈이 생겼어요. 링크드인을 통해 개발자를 뽑는 인턴십 채용공고에 무작정 지원하기 시작해 한국에 돌아와서까지 아마 300~400개 회사에 이력서를 넣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인터뷰 요청을 한 회사는 3~4곳뿐이었고 한국서 새벽에 전화 인터뷰에 응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어요.”
반쯤 포기한 상태로 3학년 1학기를 보낸 후 2022년 여름방학 때 다시 실리콘밸리로 간 민웅씨는 다시 인턴십에 도전했고 마침내 한 곳으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았습니다. 면접을 앞두고 박 대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죠. 박 대표의 조언은 단 한 가지, 면접을 봤던 매니저에게 무조건 e메일을 보내라는 거였어요. ‘나는 너희 회사 근처에 살고, 일도 엄청 열심히 할 수 있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배울 수 있다’ 등등 입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어필하라는 거죠. 그 조언대로 간절함을 담아 e메일을 보냈고 결과는 ‘합격’이었어요. 그 회사가 바로 지금 일하는 자브라입니다.
인턴십에 합격한 후 딱 6개월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휴학한 민웅씨는 6개월 후 다시 6개월을 연장해 미국에서 인턴십을 진행했어요. 학사 학위만큼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터라 더는 복학을 미룰 수 없다고 한 민웅씨에게 회사는 학위는 필요 없으니 계속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죠.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꺾지 않은 민웅씨에게 회사는 학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비대면 원격근무를 해도 된다는 통 큰 제안을 했어요. 이후 1년간 민웅씨는 ‘주독야경’(낮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엔 온라인으로 일하는)의 시간을 보냈죠. 인턴십 기간 도대체 어떻게 일했기에 회사에서 꼭 붙잡는 인재가 됐을까요.
2021년 여름방학 첫 실리콘밸리 부트캠프 참여 당시 발표 자료로 사용했던 프로젝트 시스템 아키텍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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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인턴을 뽑을 때 저와 미국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 1명, 총 2명을 뽑았어요. 아마 일을 시켜보면서 2명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평가했을 것 같아요. 제 경우 부트캠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상사가 어떤 태스크를 주더라도 알아서 해결했어요. 잘 모르는 분야라도 구글링해서 알아내고 결과물을 만들어 낸 다음 매니저에게 피드백을 받는 식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인턴 동기인 미국 여학생은 태스크를 잘 이해하지 못하니 아예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민웅씨는 이 같은 문제해결능력이 개발자에게 꼭 필요한 역량이라고 강조했죠. 2021년 여름방학, 부트캠프에서 5주간 프로젝트에 푹 빠져 지내면서 스스로 방법을 찾고 뭔가를 만들어 내는 개발이라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이게 바로 자신의 적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특히 개발자의 경우 적성이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한 친구 중 적성이 아예 안 맞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꽤 많더라고요. 그리고 개발을 공부하는 학생 중 막연하게 ‘AI 개발자가 되겠다’고 꿈꾸는 경우가 많은데 먼저 채용공고부터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현업에서 AI 개발자를 찾는 경우가 많진 않거든요. 우리 회사에도 AI 관련 개발자는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석사까지 마치고 AI 학습을 전문적으로 하셨죠. AI분야는 기본적으로 수학과 통계를 잘해야 하고 모든 과정에 있어 근본을 잘 이해하는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ES 2024에는 테커 멤버들과 함께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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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웅씨는 ‘개발’이라는 하나의 직무 안에도 분야가 무척 다양하다고 설명했어요. 임베디드 개발자, 모바일 개발자, 클라우드 개발자 등 다양한 세부 직무가 있으며, 개발자 취준생이라면 먼저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그중에서 본인에게 잘 맞는 직무를 선택하라고 조언했죠. 또 개발자의 일은 절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며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현재 맡은 태스크를 실리콘밸리의 다른 직원 1명, 덴마크 본사 직원 1명, 이탈리아에 있는 직원 2명과 함께 진행하고 있죠.
“각자가 작업한 결과물을 명확하게 문서화해서 다음 단계를 맡은 사람에게 전달해 주고, 그 사람과 계속 소통하면서 일해야 모든 게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내가 코딩을 잘한다며 혼자서만 뚝딱 만들어서 다른 사람한테 보내버리면 안 됩니다. 이전에 작업한 걸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해가 안 되면 업무를 진행할 수가 없으니까요.”
2024년 7월 정직원이 된 민웅씨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남은 한 학기 수업은 원격으로 참여해 2025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죠. 그가 그리는 미래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꾸준히 공부하는 현업 개발자예요. 민웅씨 회사 바로 옆에는 애플 본사가 있는데요. 동료 직원의 남동생이 애플 카메라 분야 개발을 10여 년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그런 선배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멋있게 느껴졌죠.
민웅(맨 오른쪽)씨는 2023년 겨울에도 기업 탐방을 이어갔다. 사진은 구글 베이뷰 신사옥 앞에서 테커 멤버들과 함께 찍었다. |
“개발자로 경력을 시작해 다른 직업을 가진 있는 분들도 꽤 많더라고요. 개발 관련 프로그램 매니저나 기획을 하는 프로그램 매니저, 세일즈 분야에서 테크니컬한 부분을 담당하는 분들도 있죠. 저는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개발자로 시니어·매니저까지 되고,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임팩트를 주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회사, 즉 구글·애플·메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하고 싶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민웅씨는 막연하게 대입 공부만 하지 말고 자기 적성을 먼저 찾아볼 것을 조언했어요.
“저는 제가 개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대학 입학 후에, 부트캠프를 통해 알게 된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고등학생 때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부터 시작했으면 방황하는 시간도 줄고 전과 등 힘들게 에둘러서 지금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후회가 있어요. 특히 중·고생들이 어떤 분야가 자기와 맞을지, 어떤 분야에 흥미가 생기는지를 알아보는 프로그램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부트캠프가 그 시작이었고 직업을 찾게 된 계기였으니까요. 국내 기업들도 개발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인턴십 기회를 많이 제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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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브라(Jabra): 세계 최초로 블루투스 헤드셋을 개발한 덴마크의 음향기기 제조사. 헤드셋·이어폰·스피커폰 등 다양한 오디오 장비를 제작하며, 특히 무선 이어폰과 헤드셋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과 품질을 자랑한다. 실리콘밸리 연구소에서는 화상회의 솔루션을 개발하며 3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파이썬(Python): 1991년 네덜란드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귀도 반 로섬이 발표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문법이 간결하고 표현 구조가 인간의 사고 체계와 닮아 초보자도 쉽게 배울 수 있다. 데이터 분석, 웹 개발,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부트캠프(bootcamp): 코딩 부트캠프(coding bootcamp)의 줄임말로 단기간 집중해서 코딩을 가르쳐 개발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 기관 또는 프로그램.
*PoC(Proof of Concept): 개념증명. 개발이나 시스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효율성을 확인해 성공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말한다.
*테커(Techeer): 박상현 대표가 2021년 대학생 개발자를 모아서 만든 개발자 커뮤니티. 2024년 11월 현재 150여 명의 개발자가 참여하고 있다.
*소비자가전전시회(CES·Consumer Electronics Show): 매년 1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술 전시회 중 하나로, 업계의 선두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세대 혁신 기술과 제품을 소개한다.
글=김은혜 객원기자 sojoong@joongang.co.kr, 사진=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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