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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죽은 자와 위태로운 삶이 만났다, 남태령 이곳에서 [이유진의 바디올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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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동학농민군이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 우금치의 과거가 남태령의 현재를 도왔고, 죽은 전태일이, 백남기가, 변희수가 산 자들을 구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잊지 않는다고 청년들이 응답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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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주시에선 장례식 때 성게미역국을 내놓았다. 산모의 회복을 돕거나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먹던 국을 망자를 추모할 때도 먹은 셈이다. 육개장이건 올갱이 된장국이건 뜨끈한 국은 어느 장례식에서나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긴장으로 굳은 몸을 풀어주고 피를 돌게 한다. 2014년 어느 가난한 남성은 68년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며 자기 주검을 수습할 이들 앞으로 10만원이 든 돈 봉투를 남겼다. 겉면에는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라고 썼다. 돈은 빳빳한 신권이었다. 죽은 이의 염치에 산 자들이 몰염치로 답했다. 왜 세들어 산 집에서 죽었냐, 바다나 계곡도 있지 않으냐며 산 자들이 와글와글했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 펴낸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에서 한국 근대의 간판 사상이 ‘생존의 사상’이라며 냉전의 공포 속에서 한국인들은 체면과 염치를 버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냉전시대의 ‘죽고사니즘’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먹고사니즘’으로 연결되었다. 생존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살다 보니 민주주의의 열정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되고 당장 자기 이익만을 앞세우는 경제적 합리성이 지배했다. ‘오징어 게임’ 같은 잔혹한 승자독식 드라마나 집단 서바이벌 프로그램까지, 세계에서도 유명한 한국인의 생존 사상은 수십년을 이어져 온 뿌리 깊은 공통 감각이라는 얘기다.



혼자만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영웅도, 혁명가도, 독재자도 예외 없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그에 항거하던 많은 이들도 세상을 떠났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장애를 입고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던 이광영씨는 전두환이 죽은 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반성하지 않던 전두환은 90살까지 살았다. 이씨는 68살이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투쟁했다.



2024년 한국을 또다시 계엄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자는 귀를 의심케 하는 이유를 들먹였다. 대통령 윤석열은 레드 콤플렉스라는 이념의 낡은 버튼을 정확히 눌렀다. 국회가 계엄 요구안을 가결한 뒤엔 “2시간짜리 내란이라는 것이 있느냐”고 말했다. 시민들은 ‘탄핵봉’을 흔들면서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광장을 수놓았다. 다 죽어도 나만은 살겠다는 생존 감각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겠다는 공생의 감각을 잠식하지 못했다.



남을 살리고 내가 죽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다. 전태일은 유서에서 남은 이들을 “나의 나인 그대들”이라고 불렀다. ‘12·3 내란사태’ 다음날 오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한겨레21과 만난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는 “나는 군중 가운데 한명”임을 기억하라며 “상호의존성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계엄과 내란사태에 맞선 시민들은 이 상호의존성에 대한 신뢰를 여실히 증명했다.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로 달려 나가 선두에 선 장년층 시민들은 기꺼이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다. “데모하지 마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세대의 딸들은 ‘덕질’을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해온 응원봉을 닦아 들고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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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회원과 트랙터 30여대, 화물차 50여대가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경찰에 가로막히자, 시민들이 연대해 밤샘 대치를 이어갔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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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수괴” “국짐”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며 ‘상여투쟁’을 하던 농민들은 며칠 뒤 아끼던 트랙터를 몰고 일주일에 걸쳐 서울로 향했다. 농민들이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의 차벽에 앞뒤로 가로막혀 고립되자, 시민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시위대에 속속 합류했다. 시위 인원이 다수였을 때 진압이 악랄해지지 않더라며 남태령으로 간 이들 다수가 청년 여성들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고립시켜 난방 차량을 이용하는 것도 어렵게 했다. 바깥의 사람들은 저체온증을 막는 핫팩과 뜨거운 음식을 끊임없이 전달했다.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이들에게 ‘농민가’를 배우고, 늙은 세대는 청년들의 ‘다시 만난 세계’를 익히고 함께 춤을 추면서 새벽 추위를 버텼다. 트랜스여성 운동선수이자 농업인인 나화린씨는 연단에 올라 “하늘은 우리 편”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는 20대 여성은 새벽 첫차를 타고 달려 나왔다. 농민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청년들은 “전봉준투쟁단 폐정개혁안 12조에 이미 여성·장애인·이주민·소수자 혐오와 차별 철폐가 들어있었다. 농민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다”고 했다.



버틀러는 ‘애도 가능한 계급’과 애도조차 여의치 않은 ‘폐기 가능한 계급’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민주주의 광장에서는 공적 애도가 금지되었던, ‘폐기 가능한 계급’에 대한 애도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 역시 자기 삶의 위태로움을 절박하게 느껴온 사람들이었다. 2015년 11월 앞장서서 물대포를 맞고 사망한 백남기 농민 덕분에 더 이상 추운날 물대포를 맞지 않게 됐다고 청년들은 말했다. 트랙터에 올라서서, 사회연결망서비스와 커뮤니티를 통해 백남기 농민 이야기를 쉼 없이 퍼 날랐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고 했다.



사람들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교제 살인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현장학습 실습 중 사망한 고등학생, 성확정수술 뒤 2020년 육군 강제 전역 처분을 당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변희수 하사의 이름을 차례로 외쳤다. 스스로 ‘젠더 퀴어’라고 밝힌 청년은 윤석열 정부의 성소수자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호명했다.



2020년 12월 한파 속에서 세상을 떠난 캄보디아 여성이주노동자 속헹,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산 26년을 포함해 32년 짧은 생을 살다 간 강태완(몽골 이름 타이왕), 장애해방을 외치며 산화한 장애인 열사들의 죽음을 딛고 살게 된 것을, 광장의 가장 위태로운 사람들은 떠올렸다. 엄동설한 경찰차가 만든 고립된 차벽 안에서 사람들은 차별 철폐를 외쳤다. 죽음과 삶의 감각을 경험하고 돌봄의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했다. “핫팩, 음식 보내주지 않았으면 정말 말 그대로 우린 죽었어, … 여전히 사람들이 계속 핫팩 보내주고 서로 옆 사람 확인하고 해서 살아남았어.”(‘더쿠’ 게시물) 이들은 얼어붙으면서 ‘먹고사니즘’의 생존 경제로부터 ‘세계’를 되찾아왔다.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은 시민들, 젊은이들 대신 죽자고 결의한 늙은 시민들, 저체온증에 쓰러질 때까지 농민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청년 시민들…. 이들이 2025년 비상계엄이라는 비상하고도 비장한 죽음의 순간, 겁 없이 민주주의의 숨을 불어넣었다. 죽은 자들의 시간을 딛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달으며 삶과 살과 피와 뼈와 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며 외치고 또 춤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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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행진 집회에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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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고개에서 대치가 시작된 지 30여시간 만에 행진을 다시 시작하게 된 전봉준의 후예들은 눈물로 트랙터의 시동을 걸었다. 투쟁 단장은 주름진 얼굴로 청년 여성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전태일의료센터건립위원회에 사람들이 벽돌값을 보내고 있다. 여성농민들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쇼핑몰의 서버가 버벅거릴 만큼 시민들의 결제가 이어진다. 민주주의 장례식장에서 선결제된 국밥을 삼키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차별과 혐오의 장례를 치르고 부활을 준비한다.



한국인들의 몰염치한 ‘생존 사상'을 설명한 김홍중도 21세기 한국 사회의 취약한 존재들이 울부짖는 생존에 대한 호소는 “타자들과 ‘함께-생존하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 공동체와 ‘사회’에 연결되려는 취약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위태로운 자들이 상호의존하며 ‘나만 생존하는 경제’에서 되찾아온 세계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수호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경찰청 블라인드에는 시민을 개와 바퀴벌레에 견주는 조롱이 올라왔다. 보수 언론은 남태령 시위가 ‘불법’이라 을러댄다. 시민들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어렵지 않게 전락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차가운 겨울날 헛간에서 태어난 가느다란 생명이었다. 말 구유에서 첫 숨을 들이쉰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떠날 때까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전했으며 죽음과 부활의 기적을 일깨웠다. 그가 꿈꾸던 세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우리는 왜 지상에 없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



적어도 여기까진 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질문에, 시민들이 대신 답했다. 우금치의 과거가 남태령의 현재를 도왔고, 죽은 전태일이, 백남기가, 변희수가 산 자들을 구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잊지 않는다고 청년들이 응답했다. 2024년 12월, 미래가 답했다.



2년 1개월간 이어진 ‘바디올로지’의 끝은 ‘타나톨로지’(죽음학)로 마무리한다. 독자들께 감사한다.



한겨레

이유진 |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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