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현장에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가 각자의 삶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공론화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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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12월7일 탄핵 집회에는 나가지 못했었다. 현장 분위기라도 느끼려 참가자의 후기를 찾아 읽는데 ‘퀴퍼에 온 것 같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퀴어 퍼레이드? 처음엔 거리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공통점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언론에서도 ‘축제가 된 시위’라는 표현이 나왔다.
축제는 원래 하늘을 향한 제사다.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 기원하는 일이 독특한 형식을 갖추면 축제가 된다. 전문가들은 ‘일상에서의 억압적 질서나 권위에서 벗어나 특별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창조적인 난장을 벌임으로써 공동체의 삶을 바꾸는 문화적 장치이자 놀이’라고 축제를 정의한다. 그러니 반짝이는 응원봉과 대중가요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만 두고 축제라고 하는 건 아닐 터이다. 솔직한 자유발언과 기발한 문구의 깃발, 따뜻한 선결제 물결과 응원을 보태는 자발적인 기부, 재빠른 연대의 발걸음 등도 감동적이지만 무엇보다 비상계엄으로 깨어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축제답다. 이미 부조리와 불평등이 판치던 세상을 깨달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 꿈을 이루려면 우린 낯선 이들의 곁에 서서 생소한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이며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을 할 땐, 지치지 않기 위해 축제가 필요하다.
이 원리를 일찍이 성소수자들은 알았다. 1970년 미국에서 성소수자들이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자꾸만 존엄성을 무시하고 존재를 지워버리는 사회에 맞설 방법으로 ‘나 여기 있소’라며 더 소란스럽게 존재를 들키기로 했다. 슬플수록 더 화려하게 꾸미고, 힘들수록 더 쾌활하게 춤을 추고, 외로울수록 함께 하자고 손 내밀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것이 퀴어 퍼레이드다. 한국 사회가 지난 몇년 동안 트랜스젠더를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를 떠올린다면, 성소수자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남태령, 경복궁 앞까지 망설임 없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달려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건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용산 집무실 앞 집회 금지를 뚫고 첫 집회를 연 것도 성소수자였다. 2022년 5월14일, 법원의 행정소송까지 거치며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기념 집회를 기어이 열었다. 이제 왜 성소수자들이 서울, 대구, 부산, 제주, 창원, 광주, 전주, 춘천, 인천, 대전 등에서 지난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한번 거리행진을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행사명이 왜 퀴어문화‘축제’인지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퍼레이드를 하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시 외곽으로 가서 하라는 말이 중립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임도 잘 알 것이다. 거리로 나온 성소수자들이 어떤 두려움을 이기고 나왔는지까지도.
이 싸움은 길어질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다음 선거, 그리고 그 선거 이후까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니 주목하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서슴지 않는 또 다른 윤석열‘들’이 아직 있다. 공무원 500명을 동원해 대구퀴어문화축제를 막은 홍준표 대구시장은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서울광장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내쫓은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검토하다가 철회한 바 있다. 시민에게 총을 겨누라고 명령한 대통령을 칭송할 공간은 필요 없다. 혐오와 차별도 필요없다. 다시 만날 세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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